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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극장 ㅣ 피카 그림책 17
아라이 료지 지음, 황진희 옮김 / FIKAJUNIOR(피카주니어) / 2024년 11월
평점 :
추워지기 시작하면 올해의 겨울 그림책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위한 선물은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그림책을 혼자서 아끼고 모으기도 한다.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101마리 달마시안>, <나홀로 집에>를 그렇게 읽었고 프랭크 바움의 <산타클로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내게로 온 첫 번째 겨울 그림책은 아라이 료지의 『눈 극장(황진희 옮김, 피카주니어, 2024, 2022, 40면 분량)』이다. 예술대 졸업 후 광고와 무대 미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환상적 화풍으로 사랑받아온 작가는 21세기 일본 그림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눈 극장』은 대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집이라는 공간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일상의 장소이지만 갈등과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친구와 함께 따뜻한 방에서 책을 볼 때, 그 책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찬 “나비 도감”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비 도감은 아빠가 무척이나 아끼는,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책인데 아뿔싸, 이 책이 찢어졌다. 아이는 도감을 빌려주지 않았고 아빠를 생각하며 걱정한다. “아빠가 화를 내실까.” 아이는 더 이상 평온하지 못하다. 집을 나선 아이는 온통 눈으로 덮인 마을을 바람 날개 같은 스키를 타고 쌩쌩 미끄러진다. 나비를, 아빠를, 친구를 생각하다 아이는 그만 구덩이에 빠진다. 그 곳에서 아이는 “불이 켜진 작은 극장”, “눈 극장”을 발견한다.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이동한 아이가 눈을 감았다 뜨자 환상 세계는 다시 한 번 확대된다.
눈 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라는 환상 자체가 이미 아이의 마음을 위로한다. 관객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의 무대’에 초대되어 직접 공연에 참여함으로 내적인 힘을 강화하고 마음은 정화된다. 조용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커지고 거대한 눈 팽이 형상을 갖춘다. 눈의 여왕도 노래를 듣고 있다고 할 때 화면 전체를 활용한 눈 팽이 위에 작지만 선명한 눈의 여왕이 지팡이를 짚은 채 내려다보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자연스럽고도 치밀한 연결이 독자의 상상을 기쁘게 채운다. 손톱만한 눈의 아이들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더 이상 이름 없는 눈송이, 생명 없는 결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나비와 친구를 다시 떠올릴 때 아빠의 ‘커다란 손’으로 상징하는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만 내밀한 체험은 빼앗기지 않을 기억으로 동심에 박힌다. 책은 절정을 지나 안전한 귀가를 준비하고 마지막 장면은 더없이 안온하다.
서사는 단순하다. 현실에서 판타지로,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이야기. 세상 근심은 꿈으로 위로받기도 하고, 꿈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다. 시기적절한 도움과 너그러운 허용은 좋은 기억의 창고를 넓힌다. 앞면지와 뒷면지는 단색 배경에 스키를 타는 소년만 등장한다. 집을 나서는 소년과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을 의미하겠지만 소년은 한 뼘 자랐을 것이다. 타이틀 표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때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두 아이가 궁금해진다. 이 그림책은 화려한 색의 향연이 압도적이다. 색색의 나비가 잔상으로 남아 하얀 일색의 눈 공연이 아닌 강렬한 원색의 폭죽을 터뜨린다. 누구나 한 번쯤 스노우 볼 안의 세상을 동경했을 것이다. 두꺼운 유리로 벽을 치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공간에 초청받는 행복을 잠시 만끽한다.
함께 보고 싶은 책이 생각이 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존 로코의 <폭설>도 겨울이면 다시 꺼내보는 그림책이다. 말 그대로 폭설에서 살아남기를 사랑스러운 그림과 감동적인 이야기로 기록한다. 유리 슐레비츠의 <겨울 저녁>은 겨울 저녁의 빛이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가 점진적인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겨울이 좋은 분명한 이유 하나는 그림책들 때문이다. 나를 꺼내세요, 다시 펼치세요. 서가에서 기지개 켠 책들이 겨울을 알린다. 올 겨울은 특별히 더 춥겠다는 반갑지 않은 예보가 들린다. <눈 극장>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뜨거운 코코아 한 잔과 빨간 스웨터, 그리고 겨울 그림책이면 슬기로운 한파 대비로 그만일 듯하다.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