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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톨스토이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제목이면서 천사 미하일이 알아내야 할 세 번째 과제였고 답은 “사랑”이었다. 『자기 앞의 생』의 모모는 동일해 보이나 어쩌면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간절함이 스민 질문 끝에 발견한 답은 독자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안긴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3, 1975, 372쪽 분량)』은 열 네 살 소년 모모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들, 삶과 죽음을 그린 소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알고 싶어서 계속 질문하고 매일을 응시한 끝에 소년은 발견한 답을 건넨다. 소설은 다음의 제사로 시작한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열악한 조건 가운데에서도 사랑은 생으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길임을 작가는 서두에 드러내고 있다.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소설로 1975년 공쿠르상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4세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한 로맹 가리는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 상을, 『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 로맹 가리는 탁월한 대작가의 면모를 보였지만 “이미 ‘어떤어떤 작가‘라는 고정관념 속에 위지지어진 기성작가일 뿐“(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p.318)이라는 회의와 ”명성, 내 작품의 평가 기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내 얼굴‘, 그리고 책의 본질 사이“(같은 책/p.323)의 모순에 반하여 에밀 아자르를 만들어내고, 이 사실은 작가의 죽음 이후에 유서 격인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한 작가가 단 한번 받을 수 있는 콩쿠르상을 두 번 수상했을 뿐 아니라 문학계에 특별한 족적을 남긴다.
모모의 기억이 시작되는 첫 번째 순간에 로자 아줌마가 있다. 그녀는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생존자로 35년간 매춘일을 하였고, 일을 그만둔 후에는 매춘부들이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맡아 키운다. 모모의 생애 최초의 큰 슬픔도 로자 아줌마에게서 비롯되었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매월 받는 우편환 때문에 나를 돌봐주었을까 하는 의심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 라는 물음으로 이끈다. 아이의 눈에 현자로도 보이는 하밀 할아버지와 다정한 이웃 사람들은 말 뿐만 아니라 삶 자체로 여러 모양 답을 모아준다. 벨빌의 거리,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 건물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보다 낙관 편에서 바라보고 작은 온기라도 흘려보내는 사람들,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 구역이 시작되기 이전의 공간이다. 소년의 환경도 안전하지 않지만 그가 기억하는 모든 “첫 번째”는 공통의 온기, 사소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빛을 간직한다. 달걀을 훔친 모모에게 하나를 더 내어준 식료품점 아줌마, 광기는 없다고, 절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해줬던 의사 카츠 선생님은 모모의 유년을 밝힌다.
돌아보면 나는 아직 어려, 라고 여겼던 적은 없었다. 모모와 마찬가지로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먼 유년조차 심정은 독립적이었으며 의젓했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고민했고, 어린아입네 하는 일 없이 진지했다. 대다수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설이 이를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포착하고 있는 점이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앨범 한 장을 열어보고 잊고 있던 사진을 발견한 듯 할 것이다. 그럼에도 동심은 어쩔 수가 없다. 흑인들이 빵에 어린아이 고기를 끼워먹는다는게 헛소문이지만 그의 미소가 식욕 때문일 거라는 웃지 못할 추정이나, 인간의 세계보다 동물의 세계가 낫다는 로자 아줌마의 말에 밤마다 상상 속 암사자를 불러들이는 장면을 비롯해, 우산으로 만들어낸 좋은 친구, 언제나 함께하던 아르튀르까지 모모의 시선이 보여주는 아이다운 천진함, 한계 없는 상상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선입견이라고는 없이 직관하고 진실을 통찰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아이다운 천진함은 현실을 더욱 아프게 지적한다.
모모는 서커스 모형 진열장의 기계장치들 중에서 광대들을 좋아한다. 모모가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떠나기 시작”(p.90)했다고 회상한, 로자 아줌마의 건강과 나이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리게 된 때에 광대들은 실제가 아니라 모두 기계들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그는 고통도 늙음도 불행도 없는, 그래서 가짜인 서커스의 세계야말로 “인간 현실과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p.110)라고 생각하는데 필름을 되돌리며 작업하는 영화 녹음실에서 본 “거꾸로 된 세상”이야말로 자기 인생에 가장 멋진 일이라고 여긴다. 어떻게든 시간을 거꾸로 돌려주고 싶은 로자 아줌마 때문이다.
소설은 서로 사랑하는 단 둘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한 사람의 생이 다해갈 때, 전적인 보호자가 더는 자기 자신조차 보호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시간의 무심한 전진 앞에서 소년 모모가 한 순간도 눈감지 않고 맞닥뜨린 용감한 생의 경주를 담는다. 이 경주에서 결코 주류일 수 없었던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의 연대도 인상 깊다. 소설은 사랑과 연대 외에 시간의 결을 살피는 또 하나의 명작이기도 하다. 모모의 입을 빌어 작가는 시간의 가차없음을 아름답게 쓰고 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p.178) 모모는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p.179)라고 말하는데 도둑질한 쪽은 누구일까, 무엇일까? 생이 아닐까.
모모는 매일 일어나는 일, 크고 작은 사건, 감정의 일상적인 반복을 스쳐 흘려보내지 않고 “인생”, “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바라본다. 하밀 할아버지가 가장 중요한 건 말이라고 했듯이 말의 선택과 사용은 자의로 요청하지 않은 삶에서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항목이다. 한가지 더, 모모가 세상을 떠난 로자 아줌마 곁에 아르튀르와 함께 누워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p.305)를 쓰는, 성인의 눈으로 볼 때 비현실적인 애도의 과정이 마음으로는 일면 공감된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법과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가 슬픔을 서둘러 묶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버리는 일 같다. 모모에게는 그 시간이 마냥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 앞에 놓인 생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 힘이 되었을 수도 있다. 곁에서 더 사랑하고, 사랑을 멈출 수 없었던 방식이었을 테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에밀 아자르의 아들 디에고와 아들을 무척 사랑해준 스페인 가정부 할머니가 모델이라고 작가는 밝힌다. 작가는 슬픈 이야기를 슬픔 일색으로 매몰시키지 않는다. 이 슬픔은 피할 방법이 없는 삶의 디폴트 값이기도 하다. 생이 쌓여 만개한 순간은 짧고 생은 처음부터 죽음을 초청했노라며 죽음으로 가는 길을 넓힌다. 사랑하는 이가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내고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날들을 소년은 함께 걷는다. 소년이 살아내는 자기 앞의 생을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은 책 속 세상과 읽는 이의 현재를 분주히 왕래하게 만든다. 삶이 분자라면 그 안에는 무수한 결정적 순간, 그때의 감정, 잃어버린 것들, 잊고 싶은 것들, 울어야만 했던 날, 기쁨이 끊이지 않던 순간, 코미디보다 우스웠던 장면, 실수, 실패 등 작은 원자들로 빼곡할 것이다. 사람의 의지로 그 중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없는 생을 끌어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모모는 알려준다. “사랑해야 한다.” 이 말을 하루에 한 번은 말하겠다고 나와 약속한다. 미국에 정착하여 이제 구순인 아버님 댁에 머물며 읽었다. 사랑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 곁에 더 오래 오래 계시기를.
책 속에서>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