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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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울분(정영목 옮김,문학동네,2011, 2008, 248쪽 분량)태생적 조건을 넘어서 주류세계에 편입하고 싶었던 한 청년의 성장과 좌절을 부모와 자식, 타인과의 관계 맺기, 권위에 대응하는 태도, 사랑, 감정과 이성 등을 통해 다각도로 살피는 중편소설이다. 간결하면서도 무엇 하나 회피하지 않는 집요한 글쓰기는 독자에게 직접 질문하는 듯하다. 청춘의 치열함과 순수가 녹아 있다는 점에서 존 놀스의 <뷴리된 평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필립 로스는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1950대 말 데뷔작인 소설집 안녕 콜럼버스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이후 오십 여년 동안 작품을 발표하면서 전미도서상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포크너상 등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울분2008년에 칠십 세가 넘어 발표한 작품으로 청춘의 격정으로 불탈 만큼 여전히 분노하고 동시에 그 격정이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음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현명한 작가로부터 나오는 폭발을 볼 수 있는 소설”(워싱턴 포스트)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이 폭발은 독자를 긴장시키며 휴화산부터 활화산, 그리고 사화산으로까지 삶의 서사에서 긴밀한 변화를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했고 더없이 행복했지만 얼마 후 파괴적인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을까봐 겁을 먹기 시작하는데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사촌들이 전사했듯 진행중인 한국전쟁이 아들 목숨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게 가능성 중 하나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염려와 분노를 숨기지 않고 파수꾼 역할을 자처한다. 냉정한 논리주의자로 토론왕이었던 아들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거의 울부짖으며 대학을 옮긴다. 아버지의 감시로부터의 도피였다. 울분은 그렇게 아들 마커스의 여러 감정 중 주요하게 대두된다.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옮긴 마커스는 배정받은 기숙사에서 세 명의 유대인 아이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된다. 이상하고 실망스러운 일이었고 특히 바로 위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버트럼 플러서는 아버지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마커스에게 고통을 준다. 다시 플러서를 피해 공대생 엘윈의 방으로 옮긴다. 마커스는 자신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애쓰는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서, 전사한 사촌들과 달리 생존 가능성”(p.44)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p.45) 아마도 행복에 근접한 안심지대에 입성할 수 있으리라.

 

정육점이 아버지의 세계였다. 그곳은 작고 큰 칼이 있었고 피 냄새와 주검이 풍기는 냄새로 채워진 공간이었다. 아버지 가계를 구성하는 대부분 인척은 유대인들의 코셔 정육점을 했고 삼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스너 집안 사람들은 그들의 피에 잠긴 채 계속 살아가야 했”(p.47)으니 전사한 사촌들도 결과적으로는 매한가지였고, 마커스 입장에서 혈흔 가득한 아버지의 세계에서 가장 멀어지는 길이 법률가가 되는 것이었다. 자신을 밀어붙이며 목표를 추구했던 마커스는 어느 날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다. “이제 목표는 올리비아 허턴이었다.”(p.61)

 

소설은 마커스 매스너가 겪는 갈등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청년에게 갈등은 충돌 실험장의 모의 테스트처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고, 강도를 더하며 덧씌워질 뿐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마커스는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탈출을 꿈꿨다. 그러나 태생적 굴레를 넘어서고 싶어 도망친 곳에 기다리는 건 자유와 존중의 이상향이 아니었다. 세대 갈등, 종교의 강요, 반유대주의, 감정과 이성의 혼란, 사랑이라 여겼으나 ”(p.184)이라 못박는 어머니,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라는 게 인생의 요구라며 네 감정을 처리하라고 약속을 받는 어머니까지, 그의 내면은 울분을 억누르며 시달리고 결코 진정할 수 없다. 결국 도덕적 관습과 독선에 말려들어 김빠진 존재”(p.203)가 된 자신을 직면한다.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스무 살 생일을 석 달 남기고 죽은 마커스 매스너의 삶을 조망한다. 서두에 이를 밝히고 시작하는 소설임에도 연속되는 사건과 그로인한 사고의 진행, 심리 변화가 생생하여 주인공의 행적에 깊이 이입하게 된다. 또한 E.E. 커밍스를 인용한 제사 중 나는 어떤 똥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는 문장은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무신론자인 본인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채플 참석 의무는 그 시간을 참아내기 위해 속으로 군가들을, 나아가 울분이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중국의 국가까지 부르게 한다. 나아가 마커스가 코드웰 학생 과장과의 면담에서 두 번에 걸쳐 멋지고 오래되고 도전적인”(p.238) 미국의 욕설을 내뱉기에 이른다. 울분을 참지 못한 대가는 무자비했다. 회복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버지의 근심을 그대로 입증하고 만다.

 

작가는 간결하고 적확하게 필요한 문장을 선별해 독자에게 건넨다. 죽음 직전 모르핀을 맞고나서 짧은 생을 회상한 이후 벗어나에서 폭압과 울분으로부터 벗어나는 소설의 구조는 탁월하다. 마커스는 정작 으로부터도 벗어나니 그의 노력은 허무를 향한 치열한 경주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장면은 곱씹어 다시 읽게끔 하는 명문이다. 장면을 전환하여 죽음을 고찰하는 부분, 병실에 찾아온 어머니의 당부, 시간을 소급하여 했다면또는 하지 않았다면하고 가정문을 잇는 서술도 마음을 울린다. 수식 없는 문장은 웅변하고 잇달아 질문한다. 논리를 다듬고 말로 겨루는 데에 자신 있었던 청년은 처음 만나는 세상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일은 서툴렀다. 당연한 이치다. 안온한 환경과 멘토, 시대를 만나지 못해 너무 일찍 표류하다 자기만의 성 쌓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비단 마커스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이 비극은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상 같다. 그래서 여운은 길고 오래 숙고하게 만든다. 필립 로스를 만나는 첫 작품으로 추천할 만 하다



책 속에서>

이제 갑자기 네 아버지도 다른 메스너들처럼 나빠졌어. 너는 그러지 마.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 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인생이 요구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버릴 거야. 바다로 쓸려나가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감정은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감정은 가장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쓸 수 있거든.(p.184)

 

하지만 결국은 역사가 너희를 따라잡을 것이다. 역사는 배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 무대 위에 있다! , 그렇게 지독하게도 자기 시대를 모르고 살다니 정말 역겹다! 가장 역겨운 것은 너희들이 와인스버그에 들어와서 없애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무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도대체 어떤 시대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답할 수 있나? 알고는 있는가? 너희가 어떤 시대에 속해 있기는 하다는 건 알고 있나?(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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