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2009, 1836, 229쪽 분량)은 푸가초프의 반란(1772년부터 1774)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자 작가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서술자의 안목과 견해, 판단과 실천의 지향을 담고 있는 성장 소설로도 읽히며, 가정 소설의 면모도 볼 수 있다. 뿌쉬낀은 현재의 에티오피아 황태자의 후손인 어머니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어려서부터 현명한 외할머니와 유모에게서 러시아 민담과 전통을 습득할 수 있었다. 아름답지만 경박한 아내”(p.207)로 인한 고통은 결혼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허황한 결투를 초래하고 때 이른 죽음의 원인이 된다.

 

지혜롭고 사려 깊은 대위의 딸은 작가의 바라는 이상적 여성상도 포함하는 듯하다. 길지 않은 생이지만 뿌쉬낀은 소설가보다는 시인으로 불멸의 자리를 차지한다. 역자는 그가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라며 아직도 <라디오 모스끄바>에서는 뿌쉬낀의 시가 낭송되고 있고 어디선가 누군가는 뿌쉬낀을 읽거나 뿌쉬낀을 연구하고 있다.”(p.213)고 설명한다. 셰익스피어가 연상되는 지점이다. 근대 러시아문학의 기틀을 확립하였으며 후대 작가와 시인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던 뿌쉬낀의 작품으로는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사등이 있다.

 

지방 귀족이며 중령으로 퇴역한 아버지는 아홉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그리뇨프가 열일곱 살이 되자 만류하는 아내의 눈물은 아랑곳없이 뜻한 바를 실행한다. 빼쩨르부르그의 근위 장교가 되리라는 아들의 기대는 곧바로 무산된다.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버지가 정한 복무지는 오렌부르그라는 벽촌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자신을 돌보아 온 마부 사벨리치와 함께 눈물을 쏟으며 길을 떠나는 도중에 만난 기병 연대 대위 이반 이바노비치 주린은 그의 슬픔에 괴로움을 보탠다. 순식간에 1백 루블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다시 길을 재촉하다 악명 높은 눈보라에 갇혔을 때 한 길손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뇨프는 그 덕분에 머물게 된 여인숙을 떠나며 감사의 표로 토끼 가죽 외투를 건넨다. 사벨리치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오렌부르그에서 조금 떨어진 벨로고르스끄 요새도, 그리뇨프가 묵을 오두막도 서글픈 처지를 한탄하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사령관인 이반 미로노프 대위와 그의 부인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과 교류하던 중 딸에게는 점차 사랑의 마음을 품고 고백시를 짓는다. 먼저 그녀에게 구애했다 거절당한 선임 장교 쉬바브린은 그의 시를 비웃고 결투 사건의 발단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착한 장군의 편지는 뿌가초프의 반란 소식과 함께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일망타진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대위 부부는 교수형으로 또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그리뇨프만 교수형 직전에 뿌가초프로부터 목숨을 건진다. 눈보라 속에서 길손으로 만났던 뿌가초프가 토끼 가죽 외투를 선사했던 그리뇨프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은 대위의 딸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참혹한 상태가 된다. 참칭자 뿌가초프가 도모하는 무시무시한 코미디”(p.99)가 끝나지 않는 가운데, 쉬바브린의 악의에 찬 술수를 피해 화자인 뾰뜨르 안드레이치와 대위의 딸 마리아의 사랑은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 있을지 남은 고비가 여전히 많다.

 

소설은 명예는 젊어서부터 지켜야 한다.”는 속담을 제사로 삼는다. 이는 본문에서 속담에도 있듯이 옷은 처음부터 곱게 입어야 하고 명예는 젊어서부터 지켜야 하느니라.”(p.15)라는 아버지의 말을 빌려 다시 한번 강조된다. 명예는 시종일관 화자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견인추 역할을 한다. 쉬바브린과의 결투, 뿌가초프 앞에서 형식적으로도 타협하지 않는 패기가 이를 보여준다. 또한 열 네 개 장이 연결되는 소설은 장마다 소제목과 제사를 따로 갖추고 있는데 인용한 제사는 다른 유명 작품도 있고, 타 작품이라고 썼으나 작가 본인의 것을 아닌 양 재치 있게 가져오기도 한다. 제사와 에피소드를 연결해 보는 일도 흥미롭다.

 

대위의 딸은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로 몰입을 높이는데 일인칭 시점 서술도 힘을 보탠다. 화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귀족과 민중의 대비는 자신들만의 명예가 다르게 특정되기에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세계에 남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저항은 예견된 수순을 밟지만 작가는 뿌가초프의 반란이 가진 의미를 소설 안에 새겨두며, 이는 뿌가쵸프 반란사라는 작가의 순수 역사물과 병행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진정성의 정도를 가늠케 한다. 대위의 딸을 읽는 즐거움은 경쾌한 문장, 긴장과 유머의 조화, 우연과 복선의 개입에서도 찾을 수 있다. 숙명을 체감하며 저항하는 결의를 교수대 민요”(p.108)로 드러내는 부분도 인상 깊다. 다만, 결말을 주도하는 대위의 딸 마리아의 에피소드는 무척 환상적이라 아쉬울 수도 있겠다. 끝에 이르러 소설은 뾰뜨르 그리뇨프의 수기를 후손이 발행하는 형식을 밝히며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사용한다.

 

대위의 딸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 뿌쉬낀의 대답을 담고 있다. 사건과 연도와 공격과 수비, 전략의 성패로 채워지는 공적 역사보다 희망을 찾아보기 어려운 혼란한 세상에서 그 무엇도 계획할 수 없는 자기 의지 상실, 명분을 향한 희생, 하루를 더 살아남기 위한 고투, 가장 소중한 자를 잃어버리고 애도의 시간을 빼앗기는 일 등을 겪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이름과 얼굴을 부여한다.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역사를 이야기는 대신 기록한다. 뿌쉬낀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노래했다. 뿌쉬낀 문학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대표 시와 산문이 필요하겠다. 소설은 시인의 치열한 생의 찬가를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지로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이것이 한때 우리 시대에 일어났음을 돌이켜볼 때,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알렉산드르 황제의 온화한 통치하에 있음을 상기해 볼 때 나는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박애주의적 법규의 확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청년들이여! 만일 나의 이 수기를 읽게 된다면 기억해 주기 바란다. 보다 훌륭하고 항구적인 개혁은 일체의 폭력적 강요를 배제한 풍속의 개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