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은 노라가 집을 나가는 결말로 맺는다.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뒷이야기는 수 차례 작품화되기도 했는데 채만식 최초의 장편소설로 ‘노라의 후일담’이라고 불리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에서 노라는 주인공 임노라가 된다. 옐리네크의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1977)는 집을 나간 노라의 홀로서기 분투 및 실패기로 씁쓸함을 준다. 결심만으로 만족스러운 성취를 이루어내기는 어렵다.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하는 길은 무수한 장애물이 깔렸을뿐더러 흐릿한 등대는 오히려 혼란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노라를 응원하는 이유는 “인형의 집”이 깨어야 할 알이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라는 데미안의 지침은 언제나 유효하다. 노라의 집이 “인형의” 집이 아니었다면 그 알, 그 세계에서 유의미한 변화와 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함을 각성한 노라의 다음 행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문 밖 찬바람 같은 타인의 시선은 소설이 출간된 당시에 비해 꽤 부드러워졌을지 모르겠다. 140년 전 소설은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를 여전히 묻고 있다. 성장의 계단을 오르고 있나, 자족하면서 매너리즘에 갇힌 건 아닌가, 어쩌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쳇바퀴 위인가를 답해야 할 차례다.
책 속에서>
노라: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 요.
헬메르: 아니라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노라: 그래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 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 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 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