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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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버킷 리스트가 자주 회자되었다. 백 개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체크리스트 형식으로 달성 날짜를 기록하며 지워나가기도 했다.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때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귀찮다는 생각, 헛짓이니 이럴 시간에 지금 할 일을 해라 등 내면의 소리가 울렸지만 두근거림, 말하자면 근거 없는 떨림도 무시 못했다. 버킷 리스트 칸이 백 개라면, 아니 천 개라도 단 하나만 거듭 적었을 사람이 있다. 바로 제이 개츠비로 이름을 바꾼 제임스 개츠다. 그는 리스트를 데이지라는 이름 하나로 빼곡히 채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요술램프의 지니 역할을 시작한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김영하 옮김,문학동네, 2009, The Great Gatsby, 1925년, 252쪽 분량)』는 시간을 되돌려 스스로를 구원하려다 추락하고 마는 이야기가 마치 포물선처럼 그려진다. 곡선의 끝은 ‘없음’으로 수렴하기에 이전 모든 점이 간직한 치열함은 독자의 속을 쓰리게 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문학의 ‘잃어버린 세대’ 작가로 1차 대전 이후 방황하던 지식인 그룹을 속한다. 여기에는 헤밍웨이, 포크너 등도 이름을 올리며 뉴욕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소설 <맨해튼 트랜스퍼>의 존 더스패서스도 같은 시기의 작가다. 그는 재즈 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과 도덕적 타락이라는 빛과 그림자가 혼재하던 시기를 통과했고 『위대한 개츠비』는 특정 시기, 떠오르는 신생 강대국의 초상을 가감 없이 포착한다. 작가는 딘빌리어스를 인용한 제사 앞에 “다시 젤다에게”라는 헌사를 더한다. 개츠비와 데이지에게서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의 투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자인 김영하는 삼 년간 매달렸던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가 젊은 작가 피츠제럴드의 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고 해석한다. 1920년 『낭만적 에고이스트』를 개작한 첫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한 뒤 세 편의 장편을 더 쓰고, 생계를 위해 수많은 단편을 발표했는데 작가의 이른 죽음 이후 대표작은 단연 『위대한 개츠비』가 된다.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도시의 불켜진 노란 창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는 자, “놀랍도록 다양한 인간사에 매혹당하는 한편으로 진절머리를 내면서”(p.50)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자라고 스스로를 인식한다. 화자는 아버지의 충고대로 감정을 개입하지 않으며 이해하는 태도로 그들을 본다. 그 기록이 이 소설이라는 설정이다.이웃인 제이 개츠비, 먼 친척 조카뻘인 데이지, 그녀의 남편이자 폴로선수로 소개받는 톰 뷰캐넌, 톰의 불륜상대 멀턴과 멀턴의 남편, 조던 베이커와의 시간은 뜨거운 여름을 통과해 가을의 초입에 이를 때 많은 것은 달라진다. 동시에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채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도 있다.

제이 개츠비의 파티는 모두에게 허용되어 있다. 밤을 밝히는 파티는 무료개장 놀이공원처럼 반짝임으로 소란스럽다. 개츠비는 모두를 환영하지만 단 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가 처음으로 만났던 ‘상류층’여자 데이지다. 데이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녀의 집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유쾌해 보였고 도시는 우수어린 매혹으로 가득 찼었다. 게츠비는 무일푼이라는 정체를 감추고 자신을 믿고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영영 놓쳤고, “그녀를 뒤에 남겨두고 간 듯”(p.188)한 느낌은 여전히 아물지 않는다. 잃어버린 보석, 유일무이한 존재 되찾기는 생의 사명이 되고 과도하게 뚜렷한 목표는 비현실적인 계획에 엔진을 달아준다. 초록색 불빛은 북극성만큼이나 재고의 여지 없는 진리가 된다. 개츠비는 플라자 호텔 스위트 룸에서 자신과 데이지의 사랑이 세상에 선포되기 원했다. 그의 맹목은 브레이크가 없다.

개츠비를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한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한 장면으로 각인시켰듯이, 바로 ‘미소’일 것이다. 닉이 개츠비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을 압도했던 미소다. 그 미소는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이며 “변치 않을 안도감을 주는, 일생에 네 다섯 번쯤 밖에 마주치지 못할 드문 성질의 것”(p.64)이다. 제이 개츠비가 톰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난 후 닉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찬사를 전했을 때 게츠비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찬란한 미소”(p.190)를 짓는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희소하고 찬란한 만큼 찰나적이다.

한편, 데이지라는 캐릭터는 목소리가 인물 자체다. 작가는 인물의 기분과 상태, 분위기와 의도, 열망과 진실, 거짓이나 번복을 목소리로 그려낸다. “그녀의 음성은 뭐랄까,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p.21) 개츠비가 정확히 보았듯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이기에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데이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범주 안에서, 그 영역이 빛나는 것들로만 꾸려진 덕에 힘들이지 않고 부(富)에서 부(富)로, 편안함에서 편안함으로 아쉬울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솔함이라고? 의식 자체가 없다.

소설은 꿈을 현실로 믿어버린, 믿기로 작정하고 자기만의 성 쌓기에 스스로 갇힌 희망의 극점을 보여준다. 희망은 거의 절망적인 기운을 띤다. 또한 어리석어 보일만큼 순수와 맞닿아 있어 독자는 개츠비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꿈을 향한 그의 헌신은 현실감각을 잃을 만큼 처연하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닉을 제외하고 그의 곁을 스쳤던 것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파티가 열리던 여름, “이 모든 사람이 그 여름 개츠비의 저택에 찾아왔었다.”(p.81)라고 적은 닉의 다이어리는 책의 두 면 이상을 할애해 방문자들을 열거한다. 작가는 왜 이토록 또박또박 별로 중요할 것 없어 보이는 이름과 행적을 기록했을까. 개츠비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의 삶의 끝에 받아야 마땅한 일말의 강렬한 개인적 관심”(p.202)은 그들 중 단 한 명만 표했다. 무참한 노릇이다. 재즈 시대, 흔들리는 운율처럼 명멸하는 익명의 군상들이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p.74)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뉴욕의 다채로운 묘사다. 감각적인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고 그 안에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화려한 도시는 작고 더러운 강이 흐르는 잿더미 계곡과 대조적이다. 데이지와 톰이 거처하는 이스트에그와 개츠비의 저택이 있는 웨스트에그의 대조는 전통적 부유층과 신흥 부자들의 대치를 보여준다. 동부로 향했지만 개츠비와 일련의 사건을 겪고 다시 중서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화자 닉 캐러웨이의 회귀도 주요 테마다.

소설은 활자로만 읽히지 않고 1920년대, 전쟁 후 미국의 도취를 불러일으킨다. 두 번 영화화 되어 어떤 페이지에서는 자동으로 영사기가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데이지의 목소리가 일으키는 끌림에 침몰하는 개츠비의 미소 외에도 많은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번역이 더욱 입체적인 간접 경험을 가능케 한 면도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매년 한 번씩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고 한다. 이미지, 상념, 현상, 어른거리는 심상을 명료하게, 게다가 간결하게 활자화시킨 문장의 향연이다. 세 번째 읽는 개츠비가 마치 초독인 듯 새로워서 일 년에 한 번은 아니어도 다시 돌아와 펼칠 것 같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를 함께 읽는 것도 추천한다. 그곳엔 지미 허프와 앨런이 있다.

책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타인의 내면을 우월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요란하게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개츠비,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제공한, 내가 진심으로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개츠비, 그만이 예외였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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