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2012, Frankenstein, 1818, 324쪽 분량)』 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이름만으로 강한 상징성을 띄고 있는 아니코닉한 대상이다. 가장 먼저 연상되는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30년대 흑백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 보리스 칼로프의 얼굴이고 여기에 만화적 캐릭터나 광고로 끊임없이 소환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을 비롯한 고전 과학소설이나 다양한 영화의 원형도 『프랑켄슈타인』에 있다. 메리 셸리는 영국의 소설가로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과 철학자이자 여권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부부의 딸이다. 작가는 서문을 쓴 시인이자 후에 남편이 되는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친구들과 여행 중에 글을 써 들려주기로 한다. 셸리는 이렇게 썼던 글을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로 익명 출간하고 아버지에게 헌정한다. 이후 인류 멸망을 그린 소설 《최후의 인간》(1826), 모험담 《퍼킨 워벡의 행운》(1830)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1831년에는 《프랑켄슈타인》을 개작해 재출간했다.
소설은 항해 상황을 전하는 월턴의 편지로 시작한다. 북극 탐험이라는 원대한 목적 앞에 당장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을 나눌 벗의 부재가 아쉽던 중 광활한 빙원에서 조난자를 발견한다. 월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가 자신을 거울삼기 바라는 마음으로 전하는 과거의 행적이 소설의 중심으로 드러나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삶이다. 명문가의 아들이었던 그는 사촌 동생 엘리자베트, 벗인 클레르발과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한 자연철학을 향한 열정은 독일의 대학에서 과학을 접하며 더욱 고취된다. 특히 생명이 발생하는 원리를 찾기 위해 귀향도 미루며 “인간 창조”(p.66)에 착수한 끝에 그토록 오래 자신에게 행복한 휴식이었던 꿈들이 “지옥”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빅토르는 비통한 소식을 듣고 귀향한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아끼던 사람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괴물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한편 결과로 볼 때 진정한 살인자는 자신이라고 여긴다. 평온을 되찾기 위하여 남은 가족과 알프스 샤모니 계곡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다. 빅토르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만난 첫 대면에서 그를 “악마”라고 호명한다. 소설의 화자가 이번에는 괴물로 옮겨간다.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생명을 부여받은 괴물은 무방비로 세상의 위협을 감내하고, 본모습을 숨긴 채 학습하고, 생각하고, 애쓰고 소망한다. 절대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원하지만 거듭 거절당한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가족 중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과, 세상의 편견에 물들지 않았을 어린아이, 결정적으로는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그의 요구는 한가지다. 동류이기에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반려자의 창조다.
3부로 구성된 소설에는 세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탐험중인 선장 월턴과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부여한 피조물이다. 작가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점층적으로 진행하고 첫 번째 화자 월턴을 마지막에 다시 등장시켜 사건의 시작과 종말을 기록하게 한다. 소설은 기록물이자 증거로서 백 년이 몇 번 지나도록 독자에게 닿고 다채로운 이미지와 서사와 변용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소설의 한 가운데에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괴물의 이야기를 배치한다. 태어난 괴물은 세상을 혼자 깨우친다. 혼자 배운 것을 되새기고 더 알아야 할 사항을 꼽아본다.
그에게 의미심장한 발견은 말로 이루어지는 소통이었는데 “진정 신과 같은 과학이었기에 나도 터득하고 싶다는 열망”(p.148)을 부추긴다. 글을 읽게 되자 “경이로움과 기쁨의 벌판”을 보게 될 뿐 아니라 사회와 종교에 대한 통찰과 자기 자신을 향한 성찰에 이른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손을 내밀고 싶었던 괴물의 소원이 차례로 실패하자 분노는 복수의 열망으로, 거절당하지 않을 대상을 향한 갈구로 이어졌다. 이마저도 좌절하자 관계를 역전시켜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노예여”라고 부른다. “네놈은 내 창조주지만, 나는 네 주인이다. 순종하라!”(p.227) 계속되는 대결은 더 많은 희생을 부른다.
소설은 입체적인 구조와 치밀한 심리묘사, 빠른 극적 전개로 시종일관 독자를 몰입시킨다. 특히 2권 2장에서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은 빼어나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p.132) 괴물의 논리는 정연하다. 나아가 간곡하다. “내 말을 들어달라.”(p.134)는 호소는 몇 번이고 반복되어 적의로 가득 찬 빅토르의 생각을 바꾸었듯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낭만주의의 한가운데를 살았던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슬프고 안타깝다. 월터가 미지의 땅을 향해 항해를 계속했듯이 빅토르는 과학의 정점에서 열릴 신세계를 꿈꿨다. 피조물인 괴물은 언어라는 도구, 이야기의 힘으로 생태적으로 다르다는 극도의 취약함을 극복할 수 있기를 꿈꿨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고 그들의 손에 들렸던 도구는 우리 손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발전은 고속으로 이루어지고 감정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으며 소통은 일관되지 못하다. 그래서 현재적이다. 소설은 섬세한 묘사로 인간의 심리뿐 아니라 풍광도 부각시킨다. 망망대해, 극지방 유빙의 포위나 장엄한 몽블랑, 라인강의 절경 등이 고통받고 갈등하는 인간과 무심한 대비를 이룬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으로 잘못 여겨져 왔으나 그를 만든 과학자다. 괴물은 ‘악마’ 또는 ‘그 존재’로 불리기도 하지만 결국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어야 할 건 이름, 즉 실존이 아닐까. 철저히 내던져진 존재의 실존 가능성 또는 연대의지를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물을 때 독자는 방관하지 못한다. 절규와 다름없는 질문은 물론, 행간에 스민 침묵까지 사유의 장으로 이끄는 고전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