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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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읽기를 가늠해 보며 책을 읽던 중에 밀란 쿤데라 부고 소식이 들렸다. 바로 전까지 생존 작가였는데 다음 페이지를 넘길 차례에 작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게의 경중을 재기 이전에 먹먹하고, 지금까지 지체했던 게 아쉽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민음사/2009/1984/496쪽 분량)』은 계속해서 질문하는 작품이다. 인물의 입장을 빌어, 또 자신의 목소리로 물을 때 감추어 둔 정답은 없다.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향하도록 의지를 내게끔 독자를 안내하고 단련시킨다.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생으로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 후 개혁이 좌절당하는 과정에서 해직과 저서 압수 등 입지가 좁아진다. 1975년에 대학의 교환교수 초청을 수용한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해 <웃음과 망각의 책>을 쓰고 5년 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출간한다. 체코어로 쓰고 바로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 작품은 《타임》지에 의해 1980년대의 '소설 베스트10'에 선정되고 ‘20세기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작가는 『생은 다른 곳에』, 『불멸』, 『이별』, 『느림』, 『정체성』, 『향수』 등의 작품을 출간하며 다수의 문학상을 받고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으나 2023년 7월 생을 마감했다.

소설은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여기에 테레자와 토마시의 개 카레닌까지 더해 사랑의 여러 빛깔을 보여준다. 사랑의 추구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연결되기에 하루를 살아내는 태도와 일상의 선택들로 이야기는 채워진다. 개인의 사적인 영역은 개인의 문제도 아니고 사적 취향이 보장받지도 못한다. 성숙한 인격체인 인물들은 성숙 이전에 속했던 육신의 부모와 환경에 여전히 지배받는다. 원가족의 그림자는 새로 이룬 가정에도 어느새 그늘을 드리운다. 인격적 독립은 연령의 문제가 아니다. 테레자는 이미 여덟 살 때부터 사랑했던 남자의 손(p.97),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토마시의 손을 놓지 못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부조리한 만남의 열매인 테레자로부터 자기 파괴적 마라톤을 시작했다. 이런 어머니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원했으나 어머니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은 “바로 테레자 자신”(p.83)임을 발견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에서도 보였던 고통스러운,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관계다. 테레자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했던 집을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인 “집단수용소”(p.222)라 이름 붙였다. 역사는 훗날 그 비극을 실제 재현한다.

프란츠는 어머니로부터 “고통”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비극을 아들에게 감추었던 어머니를 프란츠는 현실과 회상을 불문하고 사랑했다. 프란츠에게 모든 덕목 중 으뜸은 “정조”(p.155)가 된다. 프란츠의 단정한 결혼생활은 어머니의 연장선에 있을 마리클로드에서 시작되어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전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사이에 사비나라는 사랑은 모범 인간 프란츠에게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이 되고 저절로 종교가 된다. 작가는 프란츠와 사비나 사이의 몰이해와 차이 일부를 정리한다. 사비나는 배신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존재한다. 그녀는 왜 배신하는 인간이 되었을까. 두 아버지 덕분이었다. 청교도적이던 아버지. 즉, 줄로 재고 염려하고 강제하고 억압하던 아버지와 사랑과 피카소를 금지하던 가혹하고 완고한 ”공산주의“(p.156)라는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은 회한을 부르고 자기 자신의 배신을 배신코자 하나 화해는 이미 불가능하다. 프란츠는 진리 속에서 살기 위해 사랑을 선언하지만 이 결심은 사비나를 떠나게 만든다. 묘지 산책이 습관이던 사비나는 죽음의 여러 모양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고자 거듭 떠난다. 서쪽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인간이 치르는 여러 형태의 전쟁을 기록한다. 이 전쟁은 개인사에서부터 사회 구성원으로 맺는 관계들, 남녀간의 사랑, 이익집단의 다양한 행태, 전쟁과 전쟁 후유증, 기록으로서의 역사, 기록되지 못한 역사, 역사의 반복을 비롯한 다양한 층위를 비춘다. 단독자인 자기 자신에게서 오롯이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버지의 아버지로,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고, 자녀와의 관계도 소원함이나 의지와 별개로 생성, 변화한다.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면서, 선택은 계획에 어긋나면서, 강함은 약함을 증명하면서 생의 수레바퀴가 움직인다. 강함의 대변자는 어느 순간 연약한 얼굴을 노출한다. 자랑이었던 힘의 근원은 필요한 순간에 방패가 되지 못한다. 죽음은 일순간 느닷없이 다가오고 죽은자는 말이 없다. 남은자는 편의대로 죽음을 해석하고 비석의 문구도 그들 차지다.

소설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여러 각도에서 탐색한다. 니체는 영원회귀의 사상을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보았고 묵직함과 가벼움의 문제는 기원전 파르메니데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이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파르메니데스를 숙고할 때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p.13)하기에 화두로 삼는 여정이 이 소설이다. 작가는 고정된 시점 대신 순차적으로 화자를 등장시키고 시간 역시 순행과 역행을 교차한다. 등장인물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작가의 목소리로 자리를 바꾼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친절하게 분석해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p.439) 네 범주로 가를 때 온전히 수긍하며 독자는 자신이 어느 편에 나란히 설 건지 가늠하게 된다. 후반부 키치 이론에서는 작가의 주도하는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다. 또한 꿈으로 드러나는 상징들, 음악, 미술, 고전, 철학 등을 아우르며 상기시키는 장면, 아름다움, 선의, 욕망과 사랑, 절개선, 화폭을 찢는 칼로써의 질문 등 기존 의미에 더한 재해석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친구들 중 반은 이민을 갔고, 남었던 반은 죽었다. 그것은 어느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을 사실이다. 소련 침공 이후의 세월은 매장의 시기였다.”(p.368)와 같이 1963년 민주화 시기였던 프라하의 봄과 소련 침공 이후 개혁이 중단된 체코 현실, 지식인들의 형편을 기록한다.

작품의 차례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으로 펼쳐진다는 점에 시선이 머문다.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을 중심으로 2부와 4부는 <영혼과 육체>, 1부와 5부는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6부 <대장정>을 거치면 대미인 7부 <카레닌의 미소>다. 작가는 왜 카레닌을 다시 불러냈을까. “그들이 지나온 십 년의 삶을 몸으로 구현하는 절름발이 개.”(p.476) 카레닌은 인간이 벌이는 경중의 시합, 이론의 첨예함, 근거의 축적, 빛나지만 위태로운 업적을 벗어나는 세계에서 숨쉰다. 테레자는 카레닌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달랐는지, 더 나았는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의 실현을 생각하고 토마스는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말의 목을 끌어안은 니체를 사랑하듯이. 독자는 순항보다는 역경이었던 사랑의 행로를 마무리하며 과연 토마시는 가벼움이었을지, 테레자는 무거움이었을지, 단언하지 못한다. 시작은 니체였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말과 함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로 맺는 이 작품은 독자의 감각과 심정을 계속 붙든다. 쿤데라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한 특별판 표지는 카레닌이다. 단지 카레닌을 보기 위해, 라는 이유만으로 한 권을 더 갖출만하다. 현란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단순하게 종말로 착지한다. 그래서 시 같기도 음악 같기도, 생의 요약본 또는 해설, 압축한 상징 또는 만연체 해석으로도 치우침을 경계하며 매번 다르게 읽힐 작품이다.

책 속에서>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p.9)

처음과 끝에서 열차 아래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안나다. 처음과 끝에 동일한 테마가 등장하는 이러한 대칭 구성은 대단히 ‘소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적이라는 말이 ‘꾸며 낸’, ‘인공적인’, ‘삶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p.92~93)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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