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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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문학동네) 1899, 2020』은 속수무책 무거운 바통을 독자에게 넘기고는 숨죽이게 만드는 작품이다. 역자 이현우는 열린 결말을 문학적 장치보다는 등장인물의 역량 부족에서 찾는다. 읽을수록 묘하게 겹쳐지는 실루엣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될 독자는 필시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번에 읽고 다시 읽게 하는, 나아가 무한 루프에 가두는 것이 어쩌면 단편 소설이 추구하는 미덕이 아닐까. 세계 최고의 극작가, 세계 최고의 단편 작가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1860~1904)는 1000편에 이르는 단편 소설을 썼다. 나보코프는 이들 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이라고 꼽는다. 작가는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그가 활동한 시대는 ‘체호프 시대’라 불린다. 하비에르 사빌라의 일러스트를 더해 감상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상상의 여지를 한 뼘 더 넓힌다.

이른 결혼으로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구로프는 아내를 비롯해 대부분의 여성을 저급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경험에서 비롯한 결론이었고 수차례 누적된 외도는 연애의 생리부터 시작과 종결에 드리운 감정의 고저까지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일상으로 지루하게 치부되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역시 빠르게 잊힐 또 하나의 추억을 보탰을 뿐이다. 휴양지 얄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서로에게 점점 자연스러워 보인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이제 별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둘만의 공간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보인 반응은 남자에게 의외다. 그녀의 진지함은 그의 루틴을 깬다. 더 나은 삶을 찾고 싶었던,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스무 살의 안나는 결혼했고, 그때의 선택이 괴로웠고, 현재의 자신도 괴로울 뿐이다. 헤어질 시간 앞에서 구로프는 잊지 못할 거라고 진심을 전하는 그녀와 달리 가면 쓴 자신을 내버려 둔다.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자기 탓이 아니다. 그가 확신하며 ‘끝’이라 내렸던 결론. “하지만 정말로 끝나기까지는 아직도 얼마나 먼 길이 남은 것인가!”(p.47)라고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절정에 이르러 독자를 놓아버린다. 마치 롤러코스터의 꼭대기에서 숨죽인 채 동작 그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닌 이 결말, 다른 결말을 주소서, 작가에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고 싶기도 하고,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가장 복잡하고 힘겨운 일’(p.59)을 어쩔 거냐며 걱정이 앞선다. 소설은 훌훌 털고 책장을 덮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몰입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옳고 그름, 도덕과 부도덕, 사랑이냐 그를 가장한 합리화냐, 이어지는 흑백 논리만으로는 결코 만족스런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환상에 빚지는 일 없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럼에도 현재를 채우는 균일한 일상에 틈을 내고 감각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을 알아차리게 하는 장면들은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또한 구로프만 특별히 공적인 삶과 비밀스런 삶이라는 두 가지 영역을 살아내고 있을까? 조건부 진실과 조건부 기만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꿈꾸는 자들이 여전히 얼마나 많을 것인지.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보편적 갈망은 어쩌면 질문 보다는 공감을 취할 것이다. 성장은 비탈보다는 계단 오르기에 가깝다고 한다. 그로프와 안나가 의도하지 않았던 계단에 함께 오르게 되었으니 어떤 빛깔이 되었건 보이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을까. 백 년이 더 지난 고전이 고전(苦戰)하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책 속에서>

이런 항구성에, 우리들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아마도 영원한 구원의 약속, 지상에서의 삶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완성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중략) 구로프는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인간적 존엄을 잊은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했다.(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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