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는 퍼즐로 완성한 아버지의 초상, 딸이 부르는 사부곡이다. 작가는 1990년 첫 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낸 후 신춘문예 당선 및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32년 만에 나온 장편소설로 리얼리스트의 완벽한 귀환을 알린다. 정지아는 후기에서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p.267)라고 말한다.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는 독자를 흠뻑 빠져들게 했는데 허구가 아닌 자전적 색채를 덧입자 감동은 배가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남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깊은 여운과 예기치 못했던 ‘과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도와 카타르시스, 그리고 약한 체증을 동시에 경험케 하는 책이다. 소설의 시간이 끝나면 비켜갈 수 없는 독자 개인의 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p.7)라는 첫 문장이 강렬하다. 내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는 딸의 회상이 영정 속 빼뚜름한 아버지의 시선을 받으며 그려진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대학 강사인 딸 고아리는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 고상욱의 또 다른 모습과 만난다. 사회주의자였고 전 빨치산, 합리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꼿꼿한 선택과 행동이 현실주의자인 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의 나됨은 내 선택이 아니었기에 그로 인한 원망도 세월만큼이나 쌓였던 딸.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해 선 보증으로 거푸 빚을 떠안으면서도 필시 사정이 있었으리라 원망하지 않았던,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다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이 내민 조각들은 노란 머리 염색하고 할아버지를 애달프게 그리는 소녀처럼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에게도 원수처럼 여겨졌으나 그 원망을 무심히 받아내다 그대로 떠났기에 더 마음 아픈 아버지지만 작은아버지의 ‘사정’처럼 비로소 알게 된 것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청춘의 빛나는 시선을 가진 소년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사시였던 게 아니었다. 질게 뻔한 전쟁에 젊은 목숨을 살리고자 따르는 청년을 만류하는 아버지도 있었다. 그런 싸움을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헤아리는 시간, 조금 더 일찍 알 수 없었기에 슬픈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읽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재미있는 일이었나 싶을 만큼 빠져들게 만든다. 또한 고상욱이라는 인물의 삶을 엿보며 해방 이후 70년의 혼란과 비극을 살피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아픔은 깊지만 마냥 어둡지 않았다. 이는 대화와 서술의 균형, 맛깔나는 사투리(때론 노래 같은), 유머의 일상화, 타고난 재치가 곳곳에 반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공감하게 되는 진지한 사유는 독자를 머물게 한다. 작가는 아리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 맺는 법, 삶을 대하는 태도, 소중한 것을 묵묵히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

내 부모님의 해방일지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몇 해 전 이00 교수님의 자서전 쓰기 수업에 참여한 이후로 마음속 어느 구석엔가 가라앉아 있다. 혹여 흔들리기라도 하면 깔린 진흙이 금새 흙탕물로 일어날까 싶어 살금살금 걷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재미있었나? 그렇다면 이제 당신 차례요!’라고 독자를 환기시킨다. ‘저는 독자일 뿐이요!’라는 말은 궁색한 변명이다. 탓은 쉽고 감사는 어려웠던 날들, 오늘만 날인가 외면하던 순간들이 너무 늦었다고 아우성치기 전에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또는 해방은, 불편하게 옥죄는 굴레를 날 선 칼로 끊어낼 때가 아니라 이해함으로 화해할 때 목울음처럼 뜨겁게 안겨오는 게 아닐까. 한달음에 읽어내고 오래 붙잡힐 소설이 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p.33)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p.181)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