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소송Der Prozess,1925(권혁준 옮김/문학동네)』은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3부작”으로 불리는 세 편의 장편 소설(『실종자(아메리카)』, 『소송』, 『성』) 중 한 작품이다. 카프카의 벗 막스 브로트는 유고를 불태워 달라고 했던 카프카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작가 사후에 모두 출간한다. 출간할 첫 책으로 브로트가 선택한 작품은 『소송』(1925)이었고 『성』과 『실종자』가 뒤를 잇는다. 역자는 카프카의 잠언에서 “우리의 책임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처해 있는 상태가 유죄의 상태”라고 인용한다.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겪는 경험은 필연적인 좌절의 경험이고, 이는 인간의 불완전한 실존에 기인하는 것”(p.345)이라고 설명한다. 독일의 저명한 작가, 평론가, 학자들이 꼽은 '20세기 10대 소설', 독일어소설 열 작품에 카프카의 “소송”이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 이어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다. 이현우는 토마스 만의 소설 세 편과 카프카의 소설 두 편(소송, 성)이 포함된 게 눈길을 끈다며 두 작가가 20세기 독일문학의 절반인 셈이라고 덧붙힌다.(로쟈의 저공비행 인용) 『소송』이 장들의 순서 등 작가의 의도가 일부 변형된 ‘브로트 판’이 아닌 카프카 원고 그대로 편집된 ‘패슬리 판’ 번역본이라는 점은 재독을 더 기대하게 한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p.9) 첫 문장은 은행의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 요제프 K가 갑자기 체포되는 장면이다. “엄연히 법치국가에 살고 있”(p.13)는 K가 서른번째 생일날 아침에 당한 일에 분개하자 감시인은 오히려 “당신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줄을 모르는군”(p.15)하고 비난한다. 착오의 가능성도 차단한다. “법에 쓰여 있듯이 죄에 이끌려서 감시인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것이 법이라는 거요. 거기에 무슨 착오가 있겠소?”(p.15) 감독관은 그에게 절망시키려는게 아니다, 당신은 체포되었을 뿐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또한 이 체포는 K의 일상생활을 구속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체포다. 한 통의 전화는 K가 심리를 받기위해 출두해야 한다는 통보다. 특정 장소에 도착 후 심리가 열리는 방을 찾아내고, 들어가고, 맞닥뜨리는 일들은 또 다른 차원으로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이미지는 잔상으로 남고 “기이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기이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실 기이한 것만이 아름답다.”던 앙드레 브르통의 주장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억울함을 밝히고 부당함을 호소하고 싶은 K. 그는 자기만의 고유한 역사를 쌓아온 보통의 시민으로써 받아 마땅한 권리를 되찾고 자유를 누리고 싶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니 스스로를 구원키 위한 방도를 최대한 모색한다. K가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내며 출현했다 사라지곤 한다. “그는 적어도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당장 법원 전체를 때려 부술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있지 않은가? 이 정도의 자신감도 가질 수 없단 말인가?”(p.78)라는 기세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도한다. K가 통과하고 맞게 되는 경험은 과도하고 비틀려있다. 그렇기에 바로잡겠다는 마음은 더 확고해진다. 하지만 치밀하고 현란한 카프카적 묘사를 따라갈 때 K의 시도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국일 뿐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는 소송 전체인 것이다. K의 인생행로에 갑자기 이 무슨 장애물이 닥친 것인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은행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중략) 은행 업무는 소송과 연관되어 있고 소송에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그리고 법원이 인정한 일종의 고문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은행에서는 그의 업무를 평가할 때 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줄까? 아무도, 그리고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p.164) 이쯤 되면 늪이 맞다. 그런데 늪은 책이 아닌 현실에도 즐비하다. 늪, 빗물웅덩이, 돌부리, 걸림돌들은.
마지막 두 장은 “대성당에서”와 “종말”이다. 무죄를 주장하는 K에게 신부는 “그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죄 있는 사람들이 늘 그런 식으로 말하지요.”(p.264)라며 K가 법원과 관련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 지적한다. 이어 “법의 서문에는 그런 기만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p.267)로 시작하는 비유담이 재등장한다. 1915년 따로 출간되었고 카프카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는(p.168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은행나무) 『법 앞에서』다. 하지만 여기서는 신부와 K의 대화를 통해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보여준다. 카프카는 첫 장과 마지막 장을 거의 동시에 완성한 후 중간 부분을 집필했다고 한다. 마지막 장,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고군분투했던 시간은 하나의 결말을 맺는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p.287)- 이 쓸쓸한 마지막은 작가 자신이기도하고 인류 대표이기도 한 K,가 의도하고 구했던 것을 내어주지 않고 구원과도 멀다. 앞에서 변호사의 방법이라는게 ”의뢰인이 세상사를 다 잊고 소송이 끝날 때까지 이런 잘못된 길로 질질 끌려다니기를 스스로 바라게 만드는 것“이고 결국 의뢰인은 더 이상 의뢰인이 아니라 ”변호사의 개“(p.242)가 된다고 했다. 마지막 은유는 ”인생의 베일“에서 월터가 죽기 직전에 했던 말 ”죽은 건 개였다.“(p.269, 인생의 베일/서미싯 몸/민음사)에 닿는다. 역시 쓸쓸했던 죽음이다.
어울리지 않게도 “학교종”이라는 오래된 동요가 떠오른다. 이 짧은 가사 실현이 그토록 어렵나? 어렵다. 학교종이 울릴면 모이고 이때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세상. 단순하고 친절하고 자명한 세계, 우리는 예측 가능한 약속된 세계를 추구하지만 책에서 이는 찾아볼 수 없다. 종이 울리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권유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강제, 무엇보다도 우리를 기다리는 게 그곳에 있어야 할 선생님은 아니다. 법, 법원도 상급법원도 아니다. 한 사람일지 전체일지도 알 수 없다. 미지인 채로 커튼 막은 내려온다. 기요틴의 칼날처럼 속도감 있는 막이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나. 반복되는 일상, 살아있는 한 살아내야 하는, 업적도 공로도 표창도 없이 때론 죄의식 달래는 삶. 미약할 지언정 ‘이게 말이 돼?’ 외치며 한계없이 대치하고 투쟁할 때 확인케되는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닮았다. 이를 믿기 어려울만큼 빼어나게 펼쳐보이고 직면시킨다는 점이 카프카, 특히 “소송”의 매력이다.
헤세는 “이 특이한 작가의 첫 소설은 그가 죽고 2년이 지난 다음 작가의 의지를 거스르며 나왔다.”고 1925년 9월 ‘베를린 일간지’에 쓴다. 그는 “독자는 꿈결처럼 비현실적인 세계의 분위기 속으로 끌려들어가, 뒤엉킨 꿈의 실타래로 짜이는 구조물 속으로 함께 짜여 들어가고,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자신이 환상적인 꿈 세계의 이미지 속에서 지상과 지옥과 하늘을 보고 경험하고 있음을 막연히 예감한다.”며 마지막에 덧붙인다. “이 작가는 도이치 언어의 감추어진 대가이자 왕이다.”라고.(p.30,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헤르만 헤세/안인희/김영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에 이만한 도끼가 또 있을까. 재독을 마치며 다시 펼 날을 기다린다. 부분적으로 선택한 장면을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곱씹어 읽어도 좋겠다. 날개를 단 것처럼 스쳐 읽고 다시 돌아와 사진을 찍듯 멈춰 읽거나 하나의 페이지에 하루를 고정하며 읽고 싶기도 하다. 어쩌면 숨을 참고 읽어볼지도 모르는데 먼저 어울리는 장면을 추린 후 시도하겠다. 다시 읽기 위해 일부러 떠나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매일 읽는다면 화창한 태양 아래 꽃향기 가득한 날이 지속되더라도 마음의 페이지는 모노톤으로 고정될 것이다. 흐림, 흐림, 흐림으로 일관할 내적 날씨를 견딜만하다면, 그 틈새의 빛, 찬란함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여긴다면 카프카의 “소송”읽기는 빼앗기지 않을 온전한 기쁨으로 독자 곁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