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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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THE COCKROACH(민승남 옮김/문학동네)』는 카프카의 “변신” 모티프를 새롭게 변주한 작품으로 2021년 출간되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과정을 지켜보던 작가는 자국의 “우스꽝스러운 포퓰리즘 정치”에 절망을 표하며 “『바퀴벌레』를 쓰는 동안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라고 전한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유머와 풍자라고 여긴 그는 글로 구축한 세계에서 답답한 호흡을 풀고 독자를 초대한다. 1975년 소설집 “첫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데뷔, 수상한 이언 매큐언은 “어톤먼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베스트셀러 “속죄”를 비롯해 “넛셀”, “솔라”, “칠드런 액트”등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가 환기하는 카프카의 『변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p.7 문학동네) 매큐언이 차린 무대도 막이 오른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바닥에 등을 댄 자세(좋아하는 자세는 아니었다.)를 유지하며 아연실색하여 멀리 있는 발들과 부족한 다리들을 바라보았다.”(p.13) 인간 본성을 간직한 채 완결된 탈바꿈 현장에서 눈 뜬 “변신”과 달리 총리 짐 샘스의 본체는 인간이 아니다. 그를 장악한 바퀴벌레는 인간 육신을 “거대 생물체”로 인식한다. 끔찍하지만 빨리 배우는 그는 몸을 조정하는 요령을 익히고 기억을 더듬는다. 어젯 밤 기억과 오늘 아침 현실 사이를 오가며 입장을 분명히 깨닫기 시작한다. 각료회의에 참석한 짐 샘스는 랭커스터 공국 장관, 내무장관, 법무장관, 원내대표, 통상부장관, 교통부장관, 정무장관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들이 모두 한편, 같은 ‘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단 하나 “망막이라는 철벽”을 치고 있는 외무장관만 제외하면 그들은 이미 목표 달성에 일치단결 상태다.

돈의 방향을 돌리라는 슬로건 아래 역방향주의는 새로운 노선이다. 외무장관 베네딕트가 우려섞인 반론을 제시하지만 총리는 웃음으로 응대한다. “외무장관의 불가해한 죽음뿐 아니라 장례식까지 내다본 진짜 웃음”(p.54)은 섬뜩한데 그는 일관되게 지금은 소심한 시계방향주의적 사고를 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계방향주의와 대척점에 있으며 브렉시트를 상징하는 역방향주의는 사례와 효과를 나열하며 디스토피아 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책 속 갈등은 낯설지 않은 현대사회의 얼굴을 그려낸다. 이는 소설의 본래 시공간적 배경에 제한받지 않고 ‘지금, 여기’라는 거의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보편성을 띤다. 정치적 계산, 목적을 가진 설계, 정체 숨기기, “신문 지면이라는 틀에 갇혀 진실을 생성”(p.100) 해내는 언론의 작동 메커니즘을 간단 요약하고 원칙과 불법의 줄타기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작가가 벼려낸 단어, 감탄사나 리드미컬한 호흡을 보이는 문장은 은유와 상징을 압축함으로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고 여러 층위에서 풍성하게 읽힌다. “하나하나의 글자를 통제해 창조해낸 작고 정밀한 걸작이 언어적 기량을 맛보는 기쁨을 안긴다.”(오프라 매거진)는 평에 백번 공감한다. 삼 억년 역사를 가진 ‘빛을 피하는 생물’인 그들은 결국 목표를 이룬다.

본문에 앞서 작가는 이 소설이 허구임을 굳이 밝힌다. 등장인물들은 상상의 결과물이고 “현존하거나 세상을 떠난 실제 바퀴벌레와 유사점이 있다면 전적으로 우연”이라는 첨언이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이리라는 확신을 부추긴다. 경쾌한 톤과 속도감 있는 전개가 몰입을 높이는 중에도 많은 밑줄을 뚫고 웅변처럼 별을 다는 주제문들은 여기저기서 빛을 낸다. “베를린에는 독특한 회색이 있었다.”(p.111)로 시작하며 짐 샘스가 생각을 좇는 부분은 자기 확신에 안착하는 사고과정을 서술하는데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이다.”(p.92)라든지 단연 압권인 “다리가 여섯?"(p.82) 등 장면은 감탄을 유발한다. 우연히 대선 다음날 읽은 “바퀴벌레”는 묘하게도 현실을 복기하고 요약하고 증폭시킨다. 완전체인 바퀴벌레 시점에서 보는 인간은 욕망이 빈번히 지성과 충돌하는 구제 못할 하등 종이다. 전 세계적 행복의 총량은 줄지 않는다, 정의는 불변한다고 합리화하며 자신들의 번성을 위해 “역방향주의라는 광기”(p.123)를 실현시킴으로 이언 매큐언 표 블랙 코미디는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역방향주의자인가? 누군가는 자신의 방향을 애초에 잘못 인식하고 있거나 방향을 잃었거나 방향이라는 개념 자체와 무관한 무지 또는 무관심에 닻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방향, 색, 상식, 가치, 선 등 여러 기준을 들어 이분법적 잣대를 공고히 하는 일은 위험하다. 만만한 분량이지만 만만치 않은 의미를 전하는 작품으로 자발적 재독 굴레로 독자를 이끈다.

책속에서>

그는 두 시간을 들여 아마도 <가디언>에 실리게 될 기사를 썼는데, 글쓴이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재주(그의 성격엔 도무지 맞지 않는)가 필요한 종류의 고백이었다. 끈기 있게 버텼지만 세 단락을 쓰기도 전에 이미 자신이, 꼬드기거나 협박해야 하는 자신이 애처로워지기 시작했다. 결말이 열려 있는 계획이었다. 글로 써야만 발견할 수 있었다. 다 쓰고 나서, 그는 환희에 차 좁은 다락방 안을 서성였다. 촘촘히 짜인 연속적인 거짓말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이다 .(p.92)

하지만 어둠이 그들을 지배할 때마다 우리는 번성했습니다. 그들이 가난, 오물, 불결함을 포용하는 곳에서 우리는 힘을 키웠습니다. 우리는 우회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고 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인간의 파멸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지구온난화는 확실한 전제조건이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고착화된 계급, 부의 집중, 뿌리 깊은 미신, 루머, 분열, 과학과 지성과 낯선 이들과 사회적 협력에 대한 불신을 꼽을 수 있지요. 그 목록은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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