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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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문학동네.2021)』은 2013년 등단한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로 얼마 전 2021서점의 날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 소설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책을 내면서 작가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이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고백은 희령으로 내려와 천천히 회복되던 주인공 지연의 날들을 상상하게 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희령이라는 지명은 어느덧 넉넉한 품을 지닌 치유와 수용의 땅으로 공간을 내어준다.

지연은 10살 때 처음 갔던 희령을 ‘여름 냄새’와 ‘할머니’로 기억하고 있다. “다시 희령에 내려가던 날, 서른두 살의 나는 자동차 뒷좌석에 살림살이를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달렸다.”(p.10) 천문대 연구원 합격 소식을 듣고 두 번째 희령으로 향하던 시기, 지연은 이혼 후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잠을 이어 자지 못하던 때’였다. 나아져야 한다는 의지도 결심도 분명했지만 자신할 수 없음을 알고 있던 어느 날, 20여년 만에 우연히 할머니와 재회하고 이 만남은 과거의 시간과 인물들을 불러내고 현재에 숨을 불어넣는 중요한 순간이 된다.

할머니는 삼천이라고 불렸던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한다. 백정의 딸이었고 아픈 홀어머니와 둘이 지냈고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눈을 가진 삼천이는 일본군에게 끌려갈 것이 자명하던 때 증조부와 함께 개성으로 향한다. 반대하는 부모를 저버린 그의 선택이 신앙과 결단, 끌림으로 인한 자유의지였음에도 삼천이와 남편의 관계가 돌연 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걸까. 그것이 그녀 평생의 의문이었다.”(p.60) 허영심과 충동은 억울함과 울화, 죄책감과 노여움으로 바뀐 채 부정적 감정들은 오롯이 딸에게까지 전이된다. 딸, 바로 지연의 할머니는 다시 자신의 어머니 삼천이처럼 아픈 만남과 결혼과 상실에 노출된다.

할머니가 보여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삼천이, 즉 지연의 증조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와 함께다. 새비 아저씨와 새비 아주머니는 친구 같으면서도 서로를 귀하게 여겼던 부부였고 새비 아저씨는 특히 ‘해 같은 사람’(p.111)으로 아이의 눈에 비쳤던, 할머니의 아버지와는 꽤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원폭증의 피해자로 무참히 떠나고 할머니는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 더 사는 거잖아.”(p.81)라고 위안한다. 지연으로써는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소설은 부당하게 아내와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반복은 일상이 되어 감각을 마비시키는 사람들, 지연의 전 남편처럼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p.173)하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등 궤변과 합리화로 일관하는 상황, 사과하지 않는 자들의 면면을 비춘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p.252)

하나의 상처는 연쇄반응처럼 두 번째, 세 번째 소통의 기회를 차단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마음속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을,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전한다.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p.278)라고. 그럼에도 소설은 보석 같은 삶의 선물을 잊지 않는다.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는 삼천의 말에 새비 아주머니는 답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않아.”(p.258) 모든 아픔을 상쇄시킬만한 진심은 서로에게 버팀목으로 단단히 선다. 나아가 다른 농담(濃淡)을 지닌 변주가 영옥과 희자와 명숙 할머니, 미선과 명희, 지연과 지우에게서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희령에 내려와 있는 지연부터 증조모까지 4대에 걸친 인물을 소환한다. 타임머신을 탄듯한 시간 여행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생생해서 한껏 침잠해 그들의 동선을 따르게 된다. 할머니는 이야기 속에서 난산 끝에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성장하고 아프고 기쁜 순간들을 독자와 공유한다. 보호받고 사랑받지 못했던 유년은 학교에서조차 표적이 된 채 스스로 ‘생존 방법’을 터득케한다. 이는 그대로 체화되어 자신을 성찰할 여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선택할 여지를 빼앗는다. 외부에서 들리던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는 이제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고 화해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내 속의 어른 아이는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본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곤 한다. 의도할 때도 있고, 멈추지 못할 때, 무의식적으로 내뱉을 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슬로 비디오로 감지한다. 때론 그 순간이 후회와 자책, 두려움이나 새로운 매듭, 힘으로 풀기 어려울 것 같은 굵은 매듭으로 고정된다. 그리고 말의 작동을 숨죽여 확인한다.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떻게 실현되는지. 소설은 심리의 예민한 움직임과 떨림을 세심히 전달함으로 객관화하게끔 돕는다. 여러 장면에서 갈등과 대립의 굴레가 반복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보이는 관계의 회복 가능성은 마음을 쓸어내리게 한다. 작가는 소중해서, 또는 버리지 못해서 간직했던 색바랜 편지와 오래된 사진을 꺼내오게 하고 심호흡을 하며 펴보도록 이끈다. 편지와 사진이라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빗긴 이중의 구조물은 작품의 틀을 견고히 하고 독자 자신의 서랍 또한 열어보게 만든다.

엄혹한 시대,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가시철조망들을 보며 지금은 달라졌다 안도하기에 지연의 독백은 귓전을 울린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p.299) 긴 호흡으로 인생의 굴곡을 감당한 여러 인물들을 조망하는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상처 따위 아랑곳 없이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p.116), ‘기게 새비야.(p.287)라며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감동적이고 그 뜨거움이야말로 고통 앞에 허허 웃으며 기꺼이 살아나가게 하는 근원이 된다. 시원의 파도가 치는 해빙의 땅 희령에서 온전히 치유받고 출발하는 마음을 엿본다. 잊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문장들이 빼곡한 작품,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결국 새로 고침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더 이상 어둡지만은 않은 “밝은 밤”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ᅟᅳᆫ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p.14)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p.199)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p.271)

내레 몰랐다고 생각했더래? 우리 새비, 사람들이 자기 걱정하고 동정하는 거 죽는 것만큼 싫어하는 간나야. 기게 새비야. 새비가 지 마음대로, 지 살고 싶은 대로 나머지를 산다는데 내레 뭐라고······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게 새비가 바라는 기라면 내레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수 있었다.(p.287)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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