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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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문학동네/송은주 옮김)』는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1900년에 발표한 데뷔작이지만 순탄치 않은 출간과정을 격었다. 해설에서 역자는 출간 후에도 작가가 신경쇠약으로 고생할 만큼 악평과 비난이 주를 이뤘던 이유는 '당시 청교도주의 전통에 근간을 둔 도덕적 엄숙주의'(p.658)가 작가의 통찰로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이 처한 사회적·생물학적 조건하에서 필연적인 선택을 하는 수동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라(중략)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기록하고자 했’(p.660)던 자연주의 사조를 경험할 수 있다. 욕망과 우연과 운명에 무력한 인간이라는 세 겹의 보이지 않는 끈이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인간을 무심히 조정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는가라고 묻는 것을 대비해 작가는 “인간은 이처럼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본능 간의 다툼이 조정되고, 완전한 깨달음이 자유의지에 본능을 온전히 대체할 힘을 부여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이성의 지침이 진실이라는 머나먼 극점을 확실하고 변함없이 가리킬 것이다.”(p.106)라고 페이지를 할애한다. 문제는 시간의 개입이다. 그것이 언제냐 말이다. ‘이미 늦게’ 또는 ‘너무 늦게’가 되었을 때 판은 이미 비극으로 기운 후가 된다.

“캐럴라인 미버가 시카고행 오후 기차에 올랐을 때 지닌 것이라고는 작은 트렁크와 어깨에 멘 싸구려 가짜 악어가죽 가방, 점심거리를 넣은 작은 종이 상자, 노란 가죽 손지갑뿐이었다.”(p.11) 가족들에게 캐럴라인은 ‘시스터 캐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p.653)속 캐리의 모습은 외적으로 커다란 차이를 보일지언정, 내면으로 들어갔을 때 동일선상의 제자리 걸음, 기다림의 연속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녀는 타협한 적이 없고 나아지고자 또는 소유하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캐리의 구직 순례 길에서 독자는 1889년의 시카고를, ‘미국 상업사에서 흥미로운 한 장을 차지하게 될’(p.38) 초기 백화점의 화려함을 만나기도 하지만 외면당하고 혹사당하는 통유리 뒤편의 보이지 않는 작업실을 엿보게 된다. 캐리는 ‘굶주린 개처럼 자기 뒤를 따라붙을 궁핍’(p.85)대신 드루에가 내민 손을 잡는다.

작가는 인물의 성격적 특징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마치 독자가 자신의 인물들을 잘못 오해할까싶어 계속 부연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덕분에 경쾌와 경박을 오가는 가벼움, 악의는 없지만 어리석음이 문제인 드루에가 잘 보인다. 연이어 등장하는 살롱의 지배인 허스트우드와 배려라고는 없는-가정이 가정답게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내와 배려대신 ‘완벽하게 꾸며진 집’으로 그릴 수 있는(p.117)-, 어쩌면 무한히 반복되는 일반성 때문에 더 생생히 그려지는 그의 가정 분위기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드루에를 통해 캐리를 알게 된 허스트우드는 이제 그녀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운다. 마음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이상 그의 흔들림은 예견된다. 그 정점은 지배인으로서의 임무, 금고를 점검하면서 저지른 사건인데 이 장면은 영혼의 거래와도 같이 긴장감 넘치게 그려진다. 이제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배경이 바뀌고 허스트우드의 추락은 처음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과연 동일인물이었나 싶을 만한 낙폭으로 정밀하게 그려진다. 아니 미끄러뜨린다.

많은 부분, 후반으로 갈수록 시스터 캐리를 브라더 허스트우드, 미스터 허스트우드로 읽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하락은 터무니없는 범죄로부터 시작되었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무책임과 무능, 회피와 비겁함이 교대로 등장하나 동시에 그의 전전긍긍 애쓰던 모습과 대도시의 차가운 비웃음에 두려움마저 버린 채 무력하게 작아져가고 결국 패배를 선택하고 인정하기까지의 여정이 가혹할 정도로 생생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또 하나의 원인이 변화의 조짐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의 무감각함인데(p.401) 이는 드루에 에게서도 특징적으로 볼 수 있고 캐리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어떤 도움이나 안전장치도 없이 소외되는 인간은 마음 아픈 초상일 수 있다. 그래서 캐리의 승승장구와 때때로 찾아온 각성의 기회들이 덜 빛나 보였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이지만 환경은 관계를 망가뜨리고 갈등을 증폭시키고 화해하거나 귀 기울이는 것을 방해하고 분노라는 앙금을 쌓으며 소통을 완전히 차단한다. 애초에 시작부터잘못이었음에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영영 불가능할까 살피게 된다.

“이 도시를 마주하고 보니 자신이 친구들로부터 떨어져나왔다는 것, 제법 되던 재산은 물론이고 자기 이름마저 잃고 자기 자리와 안락한 삶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투쟁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p.384)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허스트우드의 말은 이 작품의 주목할 부분이다. 그는 허스트우드에서 휠러가 된다. 캐럴라인인 캐리는 캐리 드루에로, 첫 번째 무대에서 드루에를 숨기고 캐리 마덴다로, 뉴욕으로 이동해서는 캐리 휠러, 휠러 부인으로, 다시 무대에 오를 때 마덴다로 이름한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옷을 갈아입듯 이름을 바꾸는 삶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주요 배경이 뉴욕이라는 점과 성공을 위해 달리는 여주인공, 그녀와 관계 맺는 주변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에서 『맨해튼 트랜스퍼(존 더스패서스 저/문학동네/1925)』가 떠오르기도 했다. “시스터 캐리”가 나오고 5년 후에 출간된 작품으로 역시 배우였던 작중 주인공 엘렌은 많은 사람에게 열렬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일레인, 엘리, 헬레나등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개인적 성취도 이루어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일순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공허함을 의식하나 포착하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만다. 캐리보다 한 살 적은 열 일곱에 집을 나섰던 아일랜드 소녀 펠리시아(『펠리시아의 여정/문학동네』), 그녀의 무대(삶의 무대)는 어땠던가.

“시스터 캐리”는 발전을 거듭하며 물질 만능주의를 추구하는 거대도시를 배경으로 소무품이자 부속으로 전락하고 소외되는 인간을 보여준다. 표지판처럼 안내하는 첫 제목과 은유로 한 번 더 깊어지는 두 번째까지 이중의 제목을 가진 47장 구성이 독특하다. 47장 ‘패배한 자들의 길/바람 속의 하프’의 마지막 문단에서 작가는 해설과도 같은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히는데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치게 한다. 촘촘한 그물로 건져낸 후 사진 찍듯 낱낱이 써내려간 작가의 문장은 독자를 타임머신을 태워 바람 쌩쌩부는, 낙엽이나 눈발 날리는 뉴욕의 거리에 내려놓는다. “미숙한 정신에 그런 하루는 미숙한 육체에 작용하는 마약과도 같다. 갈망이 생기고, 일단 한번 채워지게 되면 영원히 꿈꾸게 되어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법이다.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p.283) 이야기의 중반을 조금 넘어선 30장 ‘위대한 왕국/꿈꾸는 순례자’에 총평처럼 등장하는 문장이다. 비유와 열거의 반복은 눈앞에 그림을 그려내고 때론 시처럼, 노래처럼 아름다운 많은 지점들은 깨닫지 못하는 인간 불행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읽어야 할 장면들 때문에 책을 덮기가 아쉽다. 작가는 넓은 식물원 안에 조금씩 떨어져 있는 조각분수처럼 의미있는 문장들을 배치했는데 곱씹고 기억해야 할 그 문장들은 소설에서 걸어나와 현재를 사는 독자에게 자기를 뽐낸다. ‘어때?’라고 묻듯이. 꿈꾸지만 생각하지 않는, 그러므로 행동하지 않는 캐리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캐리에게 찾아왔던 변화의 기회, “제가 당신이라면, 바꿀 겁니다.”(p.631)라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갈망하기만 할 뿐’(p.631) 스스로 기회를 놓아버린 채 익숙한 가면 속에 숨는 캐리를 작가는 내버려둔다. 감히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이유는 많은 경우 ‘현상 유지도 힘든데 도전은 가능할까’라는 잠재의식 속 목소리를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며’(p.653) 부캐를 확장하듯 이름 즉 가면을 바꾸어가며 꿈을 쫓을 그녀는 인간 일반의 얼굴을 표상한다. 자라지 못하는 어른아이의 얼굴이다.




책 속에서>

이런 생각을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더 고차원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과거를 곱씹지 않고 자기만의 철학과 강인한 용기를 발휘하여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몸의 평안과 관련된 문제에 극히 예민하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다. 백 달러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쪽은 무식한 구두쇠쪽이다. 육체의 안락을 남김없이 다 빼앗기고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에픽테토스이다.(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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