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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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1994/문학동네/박찬원 옮김)』은 서늘하고 불편한 시간을 끌고 간 후 기대하지 않았던 안도를 선사하는 묘한 작품이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p.324) 윌리엄 트레버의 아일랜드 소녀 펠리시아 이야기는 가본 적 없는 도시와 거리로 줄곧 마음 졸이며 어깨를 움츠린 채 따라나서게 만든다. 인물도 사건도 극히 사실적이라 그녀의 여정은 불안한 연재 기사처럼 읽힌다. 역자는 “이 책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런데 기이하게도 선은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접한 후에야 눈에 보인다.”(p.326)는 작가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우리는 선을 당연한 것으로 혹은 너무 무심히 대했던 것일까, 충격요법이 필요한 정도로!

우연히 마주친 시선 때문이었다. 열일곱 살, 오빠의 결혼식에서 화사하게 다가온 만남의 순간은 펠리시아에게 사랑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애를 태우는 두려움과 고민, 당연했던 일상과 단절하고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펠리시아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p.43)의 원천이었던 그, 사라져버린 그에게 태중의 아이를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까지 더해 “조니 라이서트 찾기”는 긴박하고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된다. 지체 없이 길을 떠나는 펠리시아를 염려하며 독자 또한 서둘러 뒤따른다.

조니에게 가까워졌을까, 낯선 곳에서 손에 쥔 단서라고는 ‘잔디 깍이 공장’ 뿐이다. 펠리시아는 우연히 힐디치 씨의 눈에 띈다. 구내식당 매니저인 힐디치 씨는 “공장은 다른 세상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의 구내식당도 마찬가지다.”(p.24)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자신의 주위를 여러 겹의 각기 다른 세상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기억의 뒤안길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p.69) 펠리시아의 출현은 ‘기억의 뒤안길’에 있는 그녀들을 일깨운다. 작가는 그의 지나온 기억과 목전의 현실과 의도하는 미래를 씨실과 날실을 교차시켜 튼튼한 이중 매듭으로 고정하는 카펫 짜기처럼 엮기 시작한다. 언뜻언뜻 궁금했던 무늬가 비밀한 윤곽을 드러낼 때까지.

버림받은 어머니와 그 곁에 남은 아들이라는 관계를 조니 라이서트에게서도 볼 수 있지만 힐디치 씨와 그의 어머니에게서 훨씬 두드러진다. 힐디치 씨는 아무도 보지 않아 ‘더는 미소가 필요치 않을 때 그는 우울한 사람이’(p.19)되며 이것이 그의 본 모습이다. 사람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를 작가는 시간 변조와 사건의 삽입을 통해 치밀하게 그려나간다. ‘혼자 살면서도 그 일은 결코-단 한 순간도-다른 기억들이 그런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p.292) 유년의 상처는 묵히고 방치된 채 그가 꿈꾸던 것들을 남김없이 걷어차버렸다. 식기를, 선반을 아무리 벗기고 닦아내도 기억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은 무대가 되고 결핍과 강탈, 거짓과 ‘배신’(p.299)을 새롭게 보상받으려는 자기만의 연극은 마취제처럼 의식을 중독시킨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그 작은 손, 자라지 못한 손으로 복수하기 시작하고 섬뜩함은 통제할 길 없이 폭주하게 된다.

“그녀의 가망 없는 사람 찾기 역시 이 변하는 세월의 일부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p.141) 조니의 흔적을 찾는 일 외에는 무엇도 아랑곳없는 펠리시아. 사람들은 다가오고 강요하고 떠난다. 천국을 권하는 사람들은 지옥처럼 끈덕지고 고단한 그녀는 위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가달라는 요청 끝에 다다른 거리. 펠리시아는 이제 거리를 통과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책 속의 책처럼 그들만의 단단한 세계를 보여준다. “꿈속에서 그들은 때로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받고, 목소리와 헛것이 전부 사라지고, 그래서 내일이면 망각에 저항하는 힘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환상을 본다.”(p.157) 거부당하고 몰락한 채 이미 비통함을 넘어선 그들은 낮에는 불평 없이 순간만을 살고 밤에는 꿈을 꾼다.

이제 지키고 보이고자 했던 아이도 없다. 소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는다. 그녀가 뿌렸던 향수 이름처럼 그 사랑은 ‘안개 속 사랑’으로 흐려져가고 안개가 걷혔을 때도 향기라곤 없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것. 그렇다고 말로 준 상처를 용서받기 원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귀환해야 이야기도 정리되고 독자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쉼을 얻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중략)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또다른 아침, 눅눅한 밤을 보내고 맞는 화창한 아침에 길을 걸으며, 그녀는 자신을 감싸는 평온함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새로이 깃든 그 평온함을 기뻐한다.”(p.312) 집을 떠날 때의 그녀는 아니다. 뒤안길을 자신의 현재로 삼았던 힐디치 씨와 달리 펠리시아는 과거의 부당했던 상처에 매이기를 거부하고 '더 이상한 일들도 일어나니까'(p.317) 라며 떠나보낸다.

“그 치과의사는 자신의 존재를 부랑자들의 썩은 이에, 부랑자들의 악취와 불결함에 바쳤다. 그녀의 선량함은 한 남자가 내뱉은 모든 말과 그가 한 모든 행동을 왜곡시킨 사악함보다도 더 큰 미스터리다.”(p.321) 길을 나서고 고난을 헤쳐 성장하게 된 펠리시아. 이토록 참혹한 대가를 치렀던 성장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펠리시아를 비롯한 책 속의 인물들은 자기만의 여정과 궤적을 그려내는데 만남과 선택의 연속으로 미세한 점은 선이되고 그것은 결국 얼굴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된다. 선택 불가능한 시작이었을지언정 그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의 여정은 만족스러운가.

그녀는 과거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의미도 규칙도 찾지 않고 ‘확실히 아는 것’만을 선택하는 삶이다. 여전히 여정 중인 펠리시아는 더 이상 무엇도 쫓지 않는다. 여정 자체가 목적이자 완성이며 필요한 것은 한 조각의 태양빛이 전부이기에. 우리 모두는 펠리시아 아닐까,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인생을, 1년을, 하루를 떠난다. 찾고 있는 것이 혹시 파랑새나 무지개는 아니기를, 사로잡히고 쫓기 위해 사소한 따사로움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 음침한 골짜기를 걸었을지언정 더 이상 오늘의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펠리시아는 현재만을 그녀의 막대기이자 지팡이로 삼는다. 떠나보낸 뒤안길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새로운 여정의 시작임은 물론이다.






(인용 및 공백 제외, 약 18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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