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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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국의 『순교자/문학동네/도정일 옮김』 는 1964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먼저 주목하게 된다. 역자는 그 의미를 한국 전쟁 발생시점에서 14년 만에, 휴전 기점으로 10년 후라는 것 만으로도 이미 ‘경이롭다’(313p.해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현재 진행형 고통 속에서 여전히 혼란스러울 시점에 서른 두 살의 젊은 작가는 완벽한 작품화를 통해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록으로 보전하고 객관화 시킴으로 공론의 장을 마련한다. “이 작품은 욥, 도스토옙스키, 카뮈의 위대한 전통 속에 있다.(314p)”고 초판 출간시 뉴욕 타임스는 평가했다는데 읽는 내내 언급한 인물과 작품들의 그림과 장면들로 쉼 없이 왕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950년 6월 어느 이른 아침 전쟁이 터졌고 북한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했을 무렵 우리는 인류문명사 담당 강사로 재직했던 대학을 이미 떠난 뒤였다.(11p)” 유엔군이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했던 전쟁이 발발한 해 10월, 육군 본부 정치정보국의 파견대 본부를 장로교회 평양 중앙교회 맞은편으로 잡는다. 화자인 이 대위는 ‘실종된 목사들에 대한 조사’임무를 맡는데 집단 총살 당한 열 두명과 살아있을 두 명을 찾아내 사실관계를 밝혀야 한다. 이 대위의 동료이면서 친구인 박 군의 아버지도 이미 죽은 목사들 중 한 명이고 신앙의 갈등으로 부자의 연을 끊었던 박군은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추적한다. 과연 당신의 말처럼 끝까지 소신을 지켜낸 죽음이었을까, 실패한 죽음이었을까를. 살아남은 두 목사, 신 목사와 충격을 못 이기고 미쳐버린 젊은 한 목사까지 그 둘과 죽음을 맞은 열 명에 대해 열은 어떻게 죽었는가 왜 둘은 살아남았는가, 목사들의 순교에는 살아남은 자의 배반이 있었을까 의심의 눈초리는 답을 요구하고 순교자와 생존자의 프레임은 견고해가며 점차 원하는 답을 의도한다.

반복되는 화두는 ‘진리란 무엇인가’이다. 신 목사의 진리는 양심의 진리, 신앙의 진리(55p)고 이에 반해 이 대위에게 진리는 ‘인간에 관한 사실(55p)’로 결을 달리한다. 장대령은 “열두 명의 순교자들은 위대한 상징이야. 그들은 고난받은 교인들의 상징이자 궁극적인 정신적 승리의 상징이지.(75p)”라며 목표하는 진리가 분명하다. 고 군목의 출현은 또 다른 물음을 동반한다. 군목이 버려야 했던 결국 공산당에게 죽음을 맞은 네 사람 중 한 명은 빨갱이들의 끄나풀(80p)이었지만 자신의 교회 장로의 아들로 영웅적인 죽음이었다 믿고 있는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진리 편 아닌가. “그 사람은 이미 늙었고, 자네가 말한 그 영광스러운 환상이 필요한 사람이야. 어떻게 감히 그 늙은이에게 또 고통을 안겨줄 수 있겠어?(83p)“ 신목사는 그를 만류한다, 그의 진리 실현을 가로막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누가 진리 편인가, 진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진리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더라도 선한 목적이면 용납해야 하는가, 선과 악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이 질문은 마지막까지도 계속 된다. 신 목사에게 이 대위는 말한다. ”저라면 진실을 얘기하겠습니다. (중략) 진실은 뇌물을 먹일 수 없는 겁니다.(85p)“ 하지만 은밀히 요청되고 만들어지는 진실을 본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103p)“ 진실은 그것이 진실이기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이 대위에게 장 대령은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153p)”며 반대한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대의를, 또 순교자들이 순교자로 남는다는 선한 목적을 위해, 장 대령은 신 목사에게 양심을 보증하기로 한다. 이는 선한 거짓말을 견딜 양심이다. 양심의 순결을 더럽히지 않는, 양심의 품질과 관계 없는 일종의 면역된 양심(109p)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는데 모든 이론은 예비되고 조정 가능하다.

“목사님의 신-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37p)”, “목사님, 목사님의 신은 저들의 고난을 진정 알고 있을까요?(202p)” 되풀이되는 이 질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나열한 예들을 상기시킨다. 죄없는 어린이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학대의 사례를 들며(1권479~496p/문학동네) 그런 신이라면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나라의 입장권을 돌려주겠다고 단언한다. 죄 없는 그들이 고통당할 때 신은 그 고난을 알고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하는 질문은 오래 되었고 여전히 반복된다. 신 목사는 아내와 한 목사의 죽음이라는 두 번의 쓰디쓴 실패로 무서운 결단을 하고 그것을 자신의 십자가라 부른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내면의 확신을 홀로 간직하겠다며 ‘하나님의 종에게 숨겨진 그 무서운 진실(263p)’을 감춘다.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중략)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257p)”신과 인간의 이분법 속에 인간의 서를 선택하는 목사. 가엾은 인간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감게 하겠다는 희망은 다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논리와 일치한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을 지닌 작품으로 매 장이 의외의 전환이나 새로운 절정으로 맺어지기에 다음 장으로 속히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장면의 전환과 그에 따른 극적 효과는 연극을 보듯이 눈앞에 그려지고 예상을 빗겨가는 진행과 속도감 있는 전개는 각 인물들이 쫓는 개별 진실을 예측하면서도 역사의 수레바퀴 속 미미한 하나의 톱니로 마모되고 부스러지는 인간 비극을 담담히 그려낸다. 고립되는 도시 평양으로 운전대를 돌리며 죽음을 목전에 둔 중환자들 곁에 남는 의사 민 소령에게는 『페스트』의 리외가 보인다. 그들은 모두 설득되지 않는 자기만의 의지를 살아내고 그 결과를 수용한다. 마지막 페이지의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전해질 때 밤낮 없이 댕그랑거리던, 이제는 흔적 없는 그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 놓지 않아야 할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 “신은 침묵하는가”일 것이고 이는 새로운 매일의 답안지를 요청한다. 무참히 고립되었던 도시 평양과 페스트의 오랑과 욥의 우스땅은 동일한 인간 조건을 의미하지 않을까.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1:1)” 욥의 고난과 순종과 영광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 하나는 역사의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의 건너편 저 멀리에서 각기 구원과 정의를 약속하며 각각 자기 쪽에 충성해줄 것을 요구하는 그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3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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