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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ㅣ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고정순 그림, 배수아 옮김, 김지은 해설 / 길벗어린이 / 2021년 5월
평점 :
안데르센의 『그림자(고정순 그림/배수아 옮김)』가 길벗어린이 출판사의 기다리던 작가앨범 시리즈로 나왔다. 표지부터 강렬하게 시선을 붙잡는데 어두운 화면 속 미소 띤 사람과 무표정한 또 하나의 얼굴이 겹쳐져 한참을 바라보게 한다. 게다가 표지의 이름들은 면면이 최고 아닌가, 배수아 번역에 김지은 해설이라니, 그에 더해 블랙홀처럼 독자를 빨아들이는 고정순 그림으로 만날 안데르센은 이미 환상적이다. 비늘처럼 번득이는 은빛 면지를 지나면 두 번의 타이틀 표지를 거쳐 현실같은 이야기 세상으로 입장하게 된다.
추운 나라 출신의 똑똑한 학자는 여행 온 더운 나라의 폭염에 심신이 지쳐간다. 그림자가 쪼그라들 정도로 속수무책 뜨거운 열기, 그나마 밤이 내려야 기운을 차리고 머무는 곳 주변의 활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건 학자의 맞은 편 집이다. 빛에 둘러싸인 꽃들 사이 광채를 던지는 실루엣을 본 이후 그녀는 누구일지, 그녀가 사는 공간조차 알거나 닿기에 어렵다. 저녁이면 역시 되살아나는 듯한 그림자에게 장난스레 읖조린 말, “(중략) 문이 반쯤 열려 있으니 그림자가 머리를 좀 쓸 줄 안다면 안으로 살짝 들어가서 살펴본 다음 나에게 모두 말해 줄 텐데! 그림자야, 그렇게 하지 않겠니? 그렇게만 해 준다면 네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일까!(19p)” 들어가서 살펴보라는 무심한 격려에 그림자는 학자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사라진다. 슬쩍 들어가 버린다. 갑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발견한 학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이 세계의 진실,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책들을 썼다.(23p)”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림자의 방문을 받게 된 학자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잃어버렸던 그림자가 성공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간 빚진 것이 있다면 지불하겠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 나에게 전처럼 하대하지 말고 존칭을 써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림자는 태연히 명령에 가까운 제안을 하고 그림자의 주인이었던 학자는 오히려 당황하며 묘한 위축감을 느낀다. 한 참 후 다시 찾아온 그림자는 동반 여행을 제안한다. “어때요, 내 그림자가 되어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게? 당신과 함께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행 경비는 내가 다 대겠어요!(36p)” 인간이 된 그림자는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낸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나온다는 학자의 말에 “그런데 세상이 원래 그렇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거고요.(36p)”라거나 하대하지 말아달라 요청했던 자신은 학자를 ‘너’라 부르고 싶다고 분명히한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바가 절반을 이루어진 것 아닌가(40p) 이유를 대며.
그림자는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확장은 공존을 염두에 두지 않아 가치를 흔들어 혼란스럽게 뒤섞고 당황한 순간에 가로채간다. 갈퀴같은 손은 자비라곤 없기에 폭력성은 두렵기 그지없다. 학자가 양보하고 한 걸음씩 받아주자 그림자는 모든 것을 내놓으라 한다. 작품해설에서 김지은 평론가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인정받고자 했던 안데르센은 사람 사이의 일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몹시 힘겨워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에드바르 콜린과의 일화에 안데르센이 충격받았다는데 독자인 나 역시 심장이 덜컥한다. 너-당신의 호칭문제는 관계를 지속하는 인간에게 늘 여러 모습으로 개입한다. 선의나 순수한 감정이 ‘그건 당신 착각이고요’로 돌아올 수도 있고, 어제의 친근한 표정이 새로운 의미로 옷을 갈아입은 채 ‘증거 있으세요’ 얼음벽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해설은 나와 타자보다는 “한 사람의 이중적 자아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내 안에서 힘을 겨루는 두 개의 자아, 이중의 인격, 익숙하고도 생경한 대치, 자동반응으로써 또는 갈등을 통한 일련의 선택과 행동, 극복하고 싶지만 챗바퀴 돌 듯 반복해서 갇히는 손쉬운 내면의 방어기제들, 핑계와 합리화 등을 생각할 때 깨어있는 의식으로 성장하고 조금씩 더 나아지기를, 나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해 진다. 안데르센의 ”그림자“를 이제라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페이지마다 웅변하는 고정순 작가의 그림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싸한 냉기, 당황해 귀가 먹먹하고 웅웅거리고 애처롭게 시선이 흔들릴 것 같은 심정이 모두 화면 안에 녹아있는 느낌이다. ”어머니 이야기(북하우스)“와 함께 또 하나의 묵직한 안데르센을 발견해 기쁘다. ”그림자“에 영향을 주었다는 ”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도 ”그림자 그림“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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