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 소설가가 책상에서 하는 일
한은형 지음 / 이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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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이봄)는 고전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상깊은 인물들을 향한 헌사에 가깝다. 책 속 인물임에도 실존 인물과 구별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 몰입하는 사람으로서 소중하게 다가왔고, 매일 한 편씩 만날 수 있었던 며칠은 책을 손에 받기까지 급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었다. 다소 긴 제목을 되풀이 읽어보다 빙하라는 키워드를 곱씹게 된다. ‘흘러내리는 얼음인 빙하, 얼음이 많아지면 자체의 무게로 흘러내린다는데 그녀들의 순도 높은 얼음 심장은 오히려 뜨거움을 일으키는게 아닐까. 그런게 있는지 모르지만 마치 얼음 부싯돌처럼.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는 작가가 독서 여정에서 만났던 특별한 여성 캐릭터 29명을 불러낸다. 불멸하는 주인공들은 한은형 작가로 인해 이름 앞에 새로운 수식어를 얻는다. 읽었던 작품 속 캐릭터가 나오면 어떻게 그려낼지 두근거리고, 만나지 못한 그녀들이라면 오호, 통재라 이 책을 아직도 안 읽고 있었다니 한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필독도서 목록이 꾸려지는데 책의 마지막 페이지 참고문헌에는 연도순으로 정렬한 주제도서를 출판사까지 실어 친절함에 또 한번 감동하게 만든다.

 

첫 번째 주인공은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다. 그녀에게는 다음 편까지 두 꼭지를 할애한다. 올해의 숙제로 담겨있는 작품인데 태어나서, 글을 알아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도 다행이라고(16p)"라는 말에 또다시 마음이 급해진다. ‘너무 많이 느끼는’, ‘죽음을 사랑하기로 한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랬기에 안나인 유일무이한 전형에 한 발 다가서게 한다. 책을 읽다보면 반드시 연결되는 책이 있고, 잊을세라 적었다가 바로 펼치게 만들곤 하는데 이런 연결이 한은형의 인물채집에 틀을 부여하고 독자를 단단히 이끈다. 유사하거나 대비되는 캐릭터가 떠오르는 순간,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는 내가 생각하는 다음 캐릭터와 비교하게도 하지만 무엇보다 캐릭터 연구에서 삶에대한 태도, 시간을 살아내는 다양한 힌트로 깊어진다. 개별 인물이 자신의 장을 넘어 다음 편으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하나의 맥락을 이루고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어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생각만 해도 갑갑해서 읽지 않으려 했던 속죄도 읽어야 겠고, 이토록 근사한 메타포라니 싶은 검은 모자가 된 사비나’, ‘세련됨의 화두를 던지는 순수의 시대의 엘렌, 온통 넘실대는 히스 밭 한가운데로 밀어넣는 폭풍의 언덕속 인물들, 이 소설은,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라는 인물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어떤 그 누군가를 만나지 못해서일 수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아면 그 누군가를 만나서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97p)" 하고 말해주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경이로웠던 만남 백년의 고독의 다음 작품으로 정하며 마음은 분주해진다. 내가 사랑해서 도서관 친구들에게 반복하는, 4차시 한 세트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깊이읽기(슬로리딩)를 고집하며 너희는 앨리스를 알아야 한다 강요하는 그녀를 저자도 꼽았기에 기쁘다.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백치의 나스따시야로 세상 모두에게 잔혹한 나스따시야로 칭하고 있다. 작년에 다시 만난 백치’, ‘죄와 벌보다 나은게 아닐까 고민했던 백치의 나스따시야가 다뤄졌다는 것 만으로도, 과연 그녀를 어떻게 말할지 두근거렸다. ‘성격 파괴형 조던 베이커(134p)', 상처받은 여자이며 조던 베이커와 달리 자존감이 망가졌던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미쉬낀 공작으로 하여금 아글라야가 아닌 나스따시야를 선택하게 했던 파과적 절망. 나스따시야는 마지막까지 안타까왔다.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를 읽으며 오랜만에 읽는 기쁨, 설레임을 한껏 느꼈다. 팔에 기분좋게 감기는 실크처럼 마음에 찰지게 감기는 문장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전해져 시원하기도 했다. 적절한 인용과 통찰력있는 해석, 솔직한 의견은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게 하기도 했다. 책표지에 있는 문구 소설가가 책상에서 하는 일을 내내 생각했다. 아마도 읽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 시간을 초월해 영원한 생명을 획득한 그토록 많은 책 속 인물들과 친구가 되어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 그것을 다시 전달하는 일, 새롭게 살아내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 선물처럼 받은 작품 목록을 가지고 이제 직접 그녀들을 만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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