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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거지 소녀(민은영옮김/문학동네)”의 작가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의 국민 작가이자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 찬사를 받고 있다. 여성으로서 여성의 삶을 그려온 먼로의 작품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임에도 이토록 익숙하게 느껴질까 싶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단편 소설이고 수많은 수상은 노벨문학상까지 이어진 반면 2012년 출간한 “디어 라이프”를 마지막 작품이라고 선언한 만큼 먼로 작품 읽기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중년 여성이 되기까지 주인공 로즈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나 변곡점을 열 개의 단편으로 묶었다. 온타리오 주 핸레티에 있는 상점 뒤편, 사회구조의 상층부를 노동자부터 채워나가는 타운의 가난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첫 이야기 ‘장엄한 매질’에서 마을의 불안하고 피폐한 분위기와 유년의 로즈를 만나게 된다. “로즈는 플로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든, 자신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중요한 것은 갈등 그 자체이며,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멈출 수 없다.(34p)"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면서도 속수무책일 때의 무력감과 부조리는 간파당하기 바라는 의도와 노골적인 응대로 이어지며 상처를 남긴다. 갈등의 절정으로 향하는 단계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도 일종의 패턴을 갖는다. 구타에서 풀려나 자신이 취할 가능한 태도를 생각하다 위로의 눈길을 받고 예쁘게 차려진 쟁반 앞에서 갈등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연속적인 장면들. 이와 같은 심리 묘사는 숨소리 마저 그려 넣은 것 같은 극사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 정밀하기까지 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을 그대로 활자화함으로 공감케하는 동시에 감정과 상황을 대상화하고 관찰하게끔 만든다.
사춘기의 혼란스러움을 따뜻하게 보듬어준 사람은, 이끌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충격받고 까발려진 그녀의 감정은, 비록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시들면서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플로는 모든 것을 말려버리는 열풍이었다.(71p)" 돌아오는 것은 비아냥과 악의 정도. 그녀는 우는 소리를 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찾아-공부라던지, 또 공부라던지-자력 탈출을 시도한다. "조심해라, 너무 똑똑해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88p)"라는 조언이 일반화되던 시간, 공간에서.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중략)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알잖아. 그림 말이야. 그 그림 몰라?(144p)" 피를 팔아서 스웨터를 사야 하는 로즈에게 이런 간극은 좁히기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가난’에 대해서 ‘오만’에 대해서 작가는 일말의 치장도 없이 분명하게 서술하는데 그 정확함이 위안을 준다. 노력으로 성취 불가능한 영역을 깨닫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녀는 정말로 패트릭을 존중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중하지 않았고, 정말로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195p)" 시간이 지나서 여전히 배우고 있다.
“특권을 누린다는 느낌이 좋아서, 그 순간의 햇살이 너무 환해서, 그녀는 그것이 현명하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297p)"‘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일은 많고, 비슷한 모양새로 반복된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또’,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의 굴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사이먼의 행운’에서 이 문장 이후, ‘기다림, 기대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보고서가 펼쳐진다. ”사이먼을 고리로 바꿔 거기에 온 희망을 걸어놓은 그녀(301p)"의 스스로에게조차 내색하지 못하는 절망과 고통, 단념과 슬픔, 인정과 회복, 사랑과 세상의 관계를 깨닫는 부분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사랑은 세상을 지워버린다고, 사랑이 잘되어갈 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308p)"
감정적으로 매몰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 준 것은 그녀가 가진 ‘관찰자적 시선’이지 않았을까. 어릴때부터 시작된 ‘사건의 기록자 역할(81p)' 말이다. “그녀는 배우고 있었다. 일 년에 두세 번씩 학교를 분열시켰던 큰 싸움을 감당하는 법을 배웠다. (중략) 아무리 겁을 내고 소심하게 굴더라도, 그 어떤 충격과 불길한 예감에 시달린다 해도, 생존법을 배우는 것은 비참하게 사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기엔 너무 흥미롭다.(58p)" 아름다운 문장으로 피상적으로 스쳐지나가던 감정, 숙고할 문제들, 숨겨있던 진실, 파장을 감내해야 하는 결과들과 선택하기 어려운 반응 등 로즈의 시간을 잠시나마 함께 통과한 듯 하다. 결국 그녀는 모든 실패와 고단함, 허무해 보이는 귀향에도 불구하고 배우고 깨달음의 연속인, 바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낸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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