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왕국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0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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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이 세상의 왕국라틴아메리카 최초로 독립과 노예 해방을 이뤄낸 혁명의 땅 아이티(171p)“의 역사와 정체성을 고스란히 작품안에 녹여낸다. 기억을 위한 기록이자 자부심의 발현이고 찬사며,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세대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카르펜티에르는 서문에서 경이로움‘, ’경이로운 현실에 대해 반복해 언급하면서 직접 작품 탄생의 단초와 목표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경이로움, 그러나 그 비현실적 상황이 정확한 현실임을 깨달을 때 내면으로부터 감정의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해설에서 역자는 그는 유럽의 일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형상화하는 경이로운 현실은 머릿속에서 나온 작위적인 것, 즉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라틴아메리카는 현실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경이로운 현실이 담긴 작품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179p)"라고 전하며 경이로움에 대해 유럽의 테크니컬한 접근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4부로 구분해 각각 4편에서 8편의 짧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인물 티 노엘의 청년기부터 노년까지의 시간에 인상깊은 실존 인물들이 차례로 명멸한다. 팔이 잘리는 불운을 겪은 마캉달은 남은 손으로 식물들의 비밀을 찾아내고 주인에게 학대당하는 만딩고족 노예에서 원수를 갚고 해방시키는 구원자로 돌아온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변신하는 능력까지 부여받아 경이로운 현실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해서 솥을 씻어냐 하나? 나는 계속해서 대나무를 먹어야 하나?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나온 것 같은 이런 질문이 가득차고, 영묘한 탑 또는 끝없이 이어지는 장벽을 세우려고 유형지로 끌려온 사람들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신음소리는 합창이 되었다.(49p)" 이런 슬픈 노래에 대한 응답으로.

 

마캉달이 신화가 되어 노예들에게 꿈처럼 숭배받고 있을 때는 이미 20년이 지났을 때다. 부크만으로부터 다시 반란의 참모부가 구성되고 행동을 개시하나 실패로 끝난다. 이제 늙고 힘없는 노인이 된 티 노엘은 자유인으로서의 안락을 꿈꾸지만 흑인왕 앙리 크리스토프의 폭정을 마주한다. 놀라운 건축물 시타렐 라 페리에르는 인간의 탐욕과 잔인함을 배경에 깔고 불가사의함으로 선망받는 유사한 건축물을 상기시킨다. 모르타르가 담긴 나무통을 운반하던 흑인이 가끔씩 구름다리에서 추락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곧바로 다른 흑인으로 대체되었고, 추락한 흑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당시까지는 피라네시의 상상적인 건축물에서만 보이던 작품들을 완성해나갔다.(110p)"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보았건만, 티 노엘은 누군가의 가죽 채찍 아래 다시 허리가 굽은 자기 신하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노인은 그렇게 끝없이 재생되는 속박, 다시 움트는 속박의 싹, 그 불행의 중식 앞에서 절망하기 시작했고, 가장 채념해버린 사람들은 결국 그런 것을 반란의 총체적인 무용성에 대한 증거로 수용하고 말았다. (중략) 인간의 옷은 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에, 잠시 그 옷을 벗어버리고 남의 주목을 덜 끄는 모습으로 플렌 뒤 노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시하는 편이 더 나았다.(155p)" 속박은 끝없이 재생되고 반란은 총체적으로 무용하다는 현실자각이 아주 먼 이야기 같지 않다. ”인간의 옷은 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에“,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목소리에 이르면 변신이라는 말도 안돼 보이는 장면에서조차 지금 당장 필요한 일말의 처방 또는 지햬를 배우고 싶어진다.

 

짧은 작품이지만 무한대로 확장되는 여백을 간직했으며 그 여백에 많은 보석이 숨어 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며 읽는다면,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더 많은 것을 내어줄 것임은 분명하다. 경이로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먹먹한 여운이 남는데 특히 이 아름다운 문장에서는 더하다. 하늘의 왕국에는 쟁취해야 할 만큼 위대한 것이 없는데, 그곳에는 모든 것의 위계가 정해져 있고, 알 수 없는 것이 없고, 존재가 무한하고, 희생이 불가능하고, 휴식과 기쁨이 있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온갖 고생과 의무로 힘들어하고 불행을 겪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재앙을 겪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이 세상의 왕국에서 자신의 위대함, 최상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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