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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첫 만남은 20대 초반의 겨울, 도스토예스키 작품을 가능한 많이 찾아서 읽던 중 한 해를 보내고 맞으며 읽었고 그날의 두근거림은 아직 잊히지 않는다. 두 번째 만남은 올해 초 ‘함께 읽기’로 ‘다시 만날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 세 번째 만남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문학동네 도스토옙스키 챌린지라는 참신한 프로그램에 손을 든 덕분이다. 이렇게 세 세트, 세 출판사의 형제들을 소장하게 되었다. 어제 밤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그 전에 '이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작별하도록 하자.'는 역자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작별하고 싶지 않아요...‘중얼거린다. 끝나자마자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고, 읽어야 할 것 같다, 1권의 첫 장을 열었던 과거의 나를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내내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말하길 이는 ‘첫번째 소설’로 주인공의 청년시절 초기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했는데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 ‘주된 소설’인 ‘두번째 소설’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두 번째 소설은, 왜, 왜! 아쉬워한다!
처음 읽었을 때 감상을 요약한다면 ‘이반에게 반하다’였다. 그의 지적, 논리적 사고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그가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내 막내동생을 닮은 알료샤가 인상 깊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의 변화는 미챠가 내가 생각하던 미챠가 아니라는 것과 알료샤의 부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비로소 ‘읽은 것 같다’고 깨닫는다. 엉뚱하게도 정삼각형을 생각하게 되었고 세 개의 꼭지점이 바로 미챠와 이반과 알료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은 정삼각뿔, 정사면체로 나아가며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꼭지점 또는 밑면이겠군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세 형제는 말도 안되는 인생의 폭정 앞에 취하게 될 행동을 ‘인간의 전형’으로 생동감있게 구축함으로써 빈틈없는 서사를 보여준다. 그들이 과연 작품 속 인물인가, 시간이라는 조건을 덧붙이자 살았었던, 그리고 죽음을 향해 가는 (나를 비롯한)실존 인물과 치열함에서 한껏 앞서있는 책 속 인물들을 구분하는 일은 그만 무의미해진다.
무심하게 지나칠, ‘으레히 그러니까’ 할 행동과 반응을 한 켜씩 분류하고 분석해서 그 심리의 원형을 독자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방식을 도처에 사용함으로써 ‘아, 나도’, ‘정말 그런데...’각성하게 만든다. 이런 각성이 정확히 보지 못하기에 불편함을 참고 넘어가야 하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시원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최소한 불분명한 죄책감을 덜어내고 태도의 방향이라도 잡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 조차 모르는 나의 감정을 누구나 가진 ‘낱말’만을 진두지휘해서 선연한 문장으로 밝히 보여주니 말이다. 일화의 형식도 ‘드러내 깨닫게 하기’에,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훌륭하게 작동한다. 이반은 학대받는 여섯 아이 이야기를 신의 초대장을 돌려주는 이유로 든다. 가장 빛나는 일화는 ‘대심문관’으로 ‘세 가지 시험’, 지상의 양식인 빵과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양심의 문제, 이분법적 대치와 떠나는 신이 드라마처럼 펼쳐지나 알료샤는 길고 복잡한 형의 고민에 단순하고 확신있게 답한다. 양파 한 뿌리, 비밀에 싸인 방문객, 호두 한 푼트, 인상적이었던 천 조 킬로미터 일화까지 계속된다.
도스토옙스키적 문장을 읽는 즐거움은 몇 번을 읽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예 중에서 ‘관조’, ‘관조자’ 묘사도 들 수 있다. 1권 537쪽 ‘우수’를 이야기할때 ‘어떤 존재나 물체가 어딘가에 비죽 불겨져나와 있는 느낌이랄까(238쪽)’를 비롯한 감정의 정밀묘사도 모호함의 범위를 확실히 줄여준다. 사건 전달자로서 작가가 목소리를 직접 내는 장면들도 친근하다. 미챠가 호흘라코바 부인에게 돈을 꾸러 갔던 장면처럼 수학, 리얼리즘, 기적 등의 단어가 튀어나오며 연극적이고 유쾌할만큼 과장되어 보이는 장면 또한 좋아하는 그만의 스타일이다. 무엇보다 반전을 간직한 결말을 보여 준 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숨은 진면목, 적나라한 민낯을 태연하게 서술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권에서 비밀에 싸인 방문객이 죽음을 앞두고 ‘내가 왜 들어갔는지 아는가?(69쪽)’ 묻는 부분에서처럼 말이다.
2권 163쪽, 관이 안치된 장로의 방에서 알료샤가 꾼 꿈과 2권 454쪽 모크로예에서 예심 중 미챠가 꾼 꿈은 다르지만 닮아 보인다. 꿈을 꾼 이후 알료샤와 미챠는 세상을 대하는 시각이 변하고 정화를 통한 내적 변화이자 미래에 대한 예표로 여겨진다. 그에 반해 또 하나의 예민한 정신 이반은 죄책감과 고통이 병을 만들고 단잠이 아닌 섬망이자 환각으로 스스로를 쓰러트린다. 미챠의 고군분투는 글로 읽어나가는 것 만으로도 내 체력이 소모되며 진이 빠지는 느낌이고 그와 반대로 이반은 스메르쟈코프로 인해 정신이 오염되어 간다. 이 복잡하고 불행한 가족에게 알료샤라는 선물은 축복과도 같다. 단 한 번도 가족의, 주위의 고통에 눈감지 않았고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비난의 자를 들지 않았다. 실질적인 행동으로 애쓰고 기도할 뿐이다. 대체 왜이래 하는 불평에 치여 죽을 수도 있을 만한 조건임에도 흐트러짐 없이 순전한 마음을 드러내고 움직인다. 서문에 ‘나의 주인공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완벽한 우리 모두의 주인공이다.
작품속 언급된 카라마조프적 특징은 정리해보고 싶었다. ‘삶의 갈증’으로 특징을 말하기도, 카라마조프적인 힘을 저열함의 힘과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대전제로, ‘모든 것을 무릎쓰고 카라마조프답게 막무가내로(2-456쪽)’, ‘비열한 놈’과는 정반대로 철학자다-철학자로, 진정한 러시아인, 카라마조프적인 본성은 드높은 이상의 심연과 저열한 타락의 심연의 부자연스런 혼합, 카라마조프는 언제나 현재의 순간만 산다, 카라마조프적인 조급함, 뻔뻔한 무절제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인생에서 만나는 돌부리들, 표도르 파블로비치, 삼소노프, 스메르쟈코프의 우열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분명한 악의는 무력함과 씁쓸함을 남긴다. 미챠의 가구나 그가 밟고 다닐 양탄자가 되겠다 자진했지만 내밀한 분노를 곱게 포장해 가까스로 감추고 있다가 법정에서 가차없이 그 포장을 찢어버리던 순간의 카챠도.
이번에는 ‘차례를 암기하면 좋겠다’는 다소 과한 욕심도 들었다. 형제들을 명명했던 이름들도 정리해보고 싶다. ‘이반은 무덤이다, 이반 형은 수수께끼다...’등. 언제쯤 다시 읽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는 또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 또한 늘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왜 선한 사람-죄없는 사람-이 고통받는가’였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선한 사람이! 오래된 질문의 답을 성경 속에서 찾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받아들이자 하면서도 알료샤는 왜 고통당해야 하는가를 또 묻는다. 그러나 알료샤를 통해서 고통을 대하는 자세, 피할 수 없다면 당면했을 때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선택하거나 조절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를 옥죄고 있는, 여러 모양을 가진 3천(루블)의 문제도 그렇게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정말이지 카라마조프 만세다!
-그 열렬한 기도 속에서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해소해달라고 빌지는 않고, 다만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린 뒷면 언제나 그의 영혼을 찾아오던 예전의 감동, 기쁨에 넘치는 그 감동만을 갈망했을 뿐이며, 잠자기 전에 드리는 그의 모든 기도는 보통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권 322쪽)
-알료샤의 마음은 이런 모호한 상태를 견딜 수 없었는데, 그건 그의 사랑이 언제나 실천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수동적인 사랑이라고는 아예 할 수가 없었고, 일단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1-377)
-하지만 난 알료샤라는 러시아 아이 하나만큼은 지독하게 좋아해.(1-472)
-“실은, 알료샤.” 이반이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끈적이는 어린 새잎들을 내가 정말로 사랑할 수 있다면, 오직 너를 떠올림으로써만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거다. 네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고, 삶에 실증을 내지도 않을 거야.”(1-534)
-그리고 너도, 조용한 너도, 나의 온유한 소년인 너도 굶주린 여인에게 오늘 양파 하나를 주지 않았느냐. 시작하거라, 얘야, 온유한 아이야, 네 일을 시작하거라······! (2-168)
-어쨌거나 이 일에 있어서는 미챠 쪽에 순진한 구석이 많았는데, 사실 그는 숱한 죄악을 저지르긴 했어도 매우 순진한 사람이었다.(2-180)
-왜, 왜 내 비밀을 털어놓아 나 자신을 욕되게 했을까!(2-438)
-“사회주의자라고요?”알료샤가 웃었다. “정말, 언제 그렇게 될 시간이 있었습니까? 아직 열세 살밖에 안 됐다고 한 것 같은데요?”(3-87)
-카라마조프들은 비열한 놈이 아니라 철학자야. 왜냐하면 진정한 러시아인은 모두 철학자니까.(3-156)
-내가 형한테 이 얘길 한 건, 형이 내 말을 믿을 테니까 그런 거예요. 나는 그걸 알아요. 나는 내 삶 전부를 걸고 형한테 이 말을, 형이 아녜요!라는 말을 한 거예요.(3-185)
-신은 있는 거냐, 없는 거냐?(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