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모험가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진다. 빗소리에 놀라 창밖을 내다보니, 학교에 가는 둘째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은 아이는 서너 걸음 가다가 잠깐 쉬고 다시 걸음을 뗀다. 아이의 머리 위로, 비옷 위로, 빗줄기는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이는 2주 전부터 목발을 짚고 다닌다. 학교에 가다가 자전거에 부딪혀 발을 다쳤기 때문이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인대가 늘어나 3주 동안 깁스를 해야 했다. 평소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울이나 유리에 제 모습을 비추어보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던 아이가 꼼짝없이 목발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목발을 짚고 학교에 가던 첫날부터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모험이었을 것이다. 짧은 등교길은 가다가 몇 번을 쉬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테고, 실내화를 갈아 신고 운동화를 신발주머니에 넣는 간단한 일조차 제게는 힘겨웠을 것이다. 교실이 있는 5층까지 계단을 올라가다가 넘어져 무릎에 퍼렇게 멍이 들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학교에 갔다 온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10분이면 걸어갈 거리지만 목발을 짚고 가기엔 아무래도 먼 것 같아 택시를 불렀다. 기사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택시를 타는 사람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아이가 다쳐서 그런 줄 알면서도 기사의 불평은 계속 이어졌다.
병원 문을 나서는데 집에 갈 일이 걱정이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이는 목발 짚고 걷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면서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데 옆에 가던 한 아이가 할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저 형아 왜 저래?”, “몰라, 저 형은 엄마 말 안 듣고 말썽부려서 그래.” 길을 가는 내내 온몸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마구 화가 났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확인하는 듯 했다.
가까운 거리를 40분이나 걸려 집에 돌아왔지만,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무리 깨워도 아이가 일어나지를 않았다. “목발 짚고 가야 하니까 더 빨리 일어나야지…….” 하니까, 겨우 일어나더니 다시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누웠다. 엄마가 성화를 부릴수록 아이는 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가 싫은 것이었다. “엄마, 어제 병원에서 집에 올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팔도 아프고, 겨드랑이도 아프고, 그리고 학교 준비물도 사야 되고, 오늘 체육 들었는데, 그럼 또 계단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한단 말이야.”
배가 아프다든지 감기가 심한 경우라면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힘들어할수록 이겨내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이 정도에서 포기하면 어떻게 하냐며 가기 싫다는 아이를 달래고 혼내고 윽박지르기까지 해도 막무가내였다. 등짝을 때리며 험한 말을 퍼붓는 엄마를 제법 쏘아보는 눈빛에는 반항심마저 일렁거렸다. 급기야는 학교에 가든지 말든지 학교 끝날 때까지 문 열어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이를 문 밖으로 내쫓았다. 책가방과 목발과 함께.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정작 힘든 건 아이일 텐데…….’ 하루 종일 자책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애써 웃어 보이려 하는 아이를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준우야, 미안해. 안 그래도 힘든 너를 엄마가 더 힘들게 했지? 막 소리 지르고 때리고 해서 얼마나 아프고 속상했니?” 가슴 속에 맺힌 말들을 풀어놓으며 부둥켜안고 우는데,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후로 아이는 목발을 짚고 생활하는 데 점차 익숙해져 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이 가방을 들어다주고, 집에 오면 동생이 심부름을 도맡아했다. 목발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면서 노는 아이의 장난기도 여전했다. “엄마, 나 이제 목발 짚고 날아 다녀…….”
오늘은 새벽부터 간간히 비가 흩뿌렸다. 전날 일기 예보에서는 비가 조금만 온다고 했는데, 비는 계속 내렸다. 걱정이 되어 학교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엄마, 괜찮아, 갈 수 있어.” 둘째는 늘 씩씩했다. 형과 동생의 중간에서 엄마가 힘들까봐 마음을 썼고, 엄마의 관심을 절실히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안 그런 척 했다.
결국 비옷을 입혀서 혼자 학교에 보냈는데, 아이가 나간 직후부터 장대비가 쏟아진다. 몰아치는 바람에 비옷의 모자까지 벗겨지고 야속한 빗줄기는 사정없이 아이의 머리를 내려친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아이의 뒷모습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아이는 세찬 눈보라를 이겨내면서 고지를 향해 올라가는 모험가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래, 준우야, 지금 네가 내딛는 발걸음은 비록 힘들지만, 네 마음이 성장하는 한 걸음이란다.’ 어렵게 제 길을 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엄마인지, 험한 세상으로 그저 등짝만 떠미는 모진 엄마인지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