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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황당하면서도 다소 기이해보이기까지 하는 제목의 이 책은 뇌 기능에 결함이 있거나 뇌 일부를 손상당한 환자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병을 이겨내거나 새롭게 적응해가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능력으로 상실을 보완하면서, 인간으로서의 통합을 잃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작가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이 책은 신경전문의가 쓴 임상사례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특정 질병과 증상을 중심으로 내용을 기술한 게 아니라, 고뇌하고 고통 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인 환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이다. 그것은 발상의 전환이고 사람 중심의 관점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별로 특별할 게 없지만, 의학뿐만이 아니라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서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문제만을 따로 떼어 내어 진단하고 처방하면서 정작 그 주체인 사람들을 간과해왔던가.
결손 환자 즉, 특정 신경이나 정신을 기능의 일부를 상실한 환자들에게서 보이는 결손에 대한 보상 능력은 참으로 놀랍다. ‘시각세계에서 감정이나 구체성, 현실성은 모두 잃어버리고 추상적, 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사는’ P선생(모자를 아내로 착각한 남자)은 음악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무너져가는 그의 삶을 어렵게 재구성한다. 고유 감각을 상실한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는 고유 감각 대신 시각과 평형기관을 이용하여 몸에 대한 감각을 보완한다. 절망을 딛고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때 우리 몸이 먼저 깨닫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결손된 기능을 보완하는 것이다.
정상인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온갖 현란한 말솜씨에 속아 넘어갈 때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용성 언어장애 환자들이 웃으며 폭소를 터트린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언어에 수반되는 말투나 톤 억양만으로도 진실 여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시각장애자의 청각능력처럼, 상실된 능력을 대신해서 발달되는 보완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정상인들은 오히려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건 아닌가. 시각이나 언어감각에 대한 과도한 발달과 의존이 마음이나 의도를 읽는 능력을 상쇄시킨다고 볼 때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아닌지…….
기억이라는 자신의 역사는 사라지고 매순간 순간만을 사는 코르사코프환자와 감정의 흥분 상태에서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투렛 증후군 환자의 경우에는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코르사코프 환자는 자기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반면에 투렛 증후군 환자는 ‘ 비참하고 잔혹하리만치 정확하게 자각’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환자가 병과 맞서 싸울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자각을 한다면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충동과 싸워야겠다는 의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투렛 증후군 환자인 익살꾼 틱 레이는 할돌 투여로 투렛증세와 그 극단인 긴장증및 파킨슨 증세 사이에서 극단적인 불균형을 겪었지만 3개월간의 철저한 준비로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었다. 병과의 싸움에서 결국 레이는 승리자가 된 것이다.
시인 레베카와 음악적 재능을 가진 마틴, 자페증 예술가 호세 등.. 작가는 저능아들에게서 천진난만함과 투명함, 그리고 존엄이라는 마음의 결을 읽었다. 호세의 그림을 보면서 나도 끝내 눈물이 났다. 사진보다 더 생생하고 표정도 풍부한 그림이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자폐증 아이들이 저능아로 천덕꾸러기로 취급받고 있는가. 우리가 그들이 잃어버린 여러 가지 능력에 더 관심을 기울일 때 올리버 색스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불행의 보상으로 더더욱 발달한 한 가지 기능’에 주목했다. 우리가 진흙덩어리만을 바라볼 때 그는 진흙 속의 보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 보석은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외부 세계와 연결시키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뇌손상 환자의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난다. 사고로 뇌가 심하게 함몰된 그 환자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어 수면제 주사를 맞아야 잠이 들었다. 그런 그의 일과는 하루 종일 전동휠체어를 타고 병원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 일이다. 힘든 일이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휴지를 줍는다. 그것은 세상을 위해서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삶의 이유이기도 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심각한 증세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들의 그런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통합과 성장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일반인보다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결국 건강하지 않거나 능력을 상실했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능력을 추스르고 발달시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존귀함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존재 자체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살아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위태롭게 흔들려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모든 이들의 숭고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