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하나님의 주권 - 롬 9:1-11:36 복음주의 설교자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5
존 파이퍼 지음, 주지현 옮김 / 좋은씨앗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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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설교자 중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자를 꼽으라면 아마도 존 파이퍼를 꼽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그가 로마서를 들고 섰으니, 가장 자신 있는 재료를 들고 서 있는 요리사와 같다 하겠다. 그가 설교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170 cm가 안 되는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열정과 기쁨이 솟아 나올까 싶을 만큼 그는 열정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설교자 중 한 사람이다.

본서는 그가 16년 동안 한 교회에서 설교했던 로마서의 다섯 번째 책으로서, 로마서 9-11장까지를 강해한 것이다. 로마서 9장 서두에서 제기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 도중에 버림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실패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주권에 대해 논증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사로잡혀 신학교수에서 교회 설교자로서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개인적인 간증으로 시작하여, 신구약 성경을 넘나들면서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력하게 증거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복음에 대해 촘촘한 주해를 행한다.

사실 이런 형식의 설교집은 대중적인 인기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소위 먹힌다는요즘 설교들은 성경 한 두 구절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감동적인 예화와 적용거리들로 채워지기 일쑤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실한 성경 강해와 문맥을 벗어나지 않는 교리적 설명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이는 현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달래주는 쿠션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절대적인 위엄과 영광으로 인간의 모든 의지와 행위를 압도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주권이라는 저자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눈에는 설교자의 그런 열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38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단숨에 읽기 보다는 매일 밤 하루에 한 장씩 한 달하고 팔 일 동안 묵상하듯 곱씹으며 읽기를 권하고 싶다. 매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사로잡혀,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 속에 안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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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역사성 논쟁 -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네 가지 관점과 목회적 적용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3
데니스 O. 라무뤼 외 지음,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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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네 가지 관점과 목회적 적용이란 부제가 붙은 본서는,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복음주의의 네 가지 견해, 즉 진화적 창조론, 원형적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 사이의 논쟁을 담고 있다. 본서의 독특성은 그 구성에서부터 눈에 띈다. ‘아담이 실존인물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각 관점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핵심적 견해를 밝힐 뿐만 아니라, 다른 입장에서의 논평을 담아 마치 잘 준비된 세미나에 실재로 참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토론 문화가 일천한 한국 교회 현장에서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는 논평들을 통해 건설적인 토론 모델을 보는 듯하여, 독자 입장에서는 모처럼 책값이 아깝지 않은 일거양득의 소득을 안겨준다.

아담이 실존인물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은 결국 성경 해석의 가로축과 과학적 연구 결과의 수용성이라는 세로축 사이에서 저마다 자리매김을 한다. 즉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해석에서 의미론적 해석까지의 씨줄과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진화론적 연구 결과에 대한 적극적 수용으로부터 소극적 수용까지의 날줄 위에 네 가지 관점이 놓여 있다.

이에 따라 진화적 창조론은 역사적 아담은 없다고 보며, 아담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본질적 믿음을 해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원형적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은 모두 역사적 아담을 인정하지만, 그 의미에 대한 강조점이 저마다 다르다. 원형적 창조론은 아담의 역사성이 아닌 원형적 대표자로서의 아담이라는 것에 성경의 강조점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오래된 지구 창조론은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간의 시초이기는 하지만, 태초에 있었던 유일한 인간 부부가 아닐 수도 있다고 간주하며, 어쩌면 그가 속한 부족의 족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 그대로 아담을 역사적 인물이자 인류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아담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각 관점은 저마다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충분히 생각해 봄직한 문제의식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네 가지 관점이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에 대한 두 개의 목회적 성찰은, 기독교 신앙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아담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입장과 더 없이 중요하다는 입장의 대조는, 우리의 믿는 바가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신앙임을 상기시킨다.

아담은 실존인물이었을까?” 아담 없이 신앙이 건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다만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며,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과 대립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열린 관점을 갖고, 아담의 역사성에 대해 확언할 만큼의 충분한 퍼즐 조각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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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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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그려진 노란 종이배가 위태롭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시퍼런 바닷물에 금방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이 종이배를 살뜰히 들어 올려 얼른 제주항에 옮겨놓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이 책의 부제는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이 문제를 담담히 숙제로 풀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받아 들고 한참을 고민했던 이유이다. ‘괜찮다말하고 툭툭 털고 일어날 아픔이 있고, 오랜 기간 신음하며 끙끙 앓아야 할 고통이 있다. 아직 내게 세월호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애도의 대상이다. 제 삼자인 나도 이럴진대,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은 오죽할까 생각하니, 눈 앞이 또 캄캄하다. 그래서 절름거리는 관점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고, 더 곱씹어야 할 날것의 생각만 종횡무진이다.

이 책은 세월호라는 특별한 사건 안에서의 신정론을 다룬다. 보편적인 신정론의 문제가 아닌, 세월호가 일어난 그날의 신정론이다. 때문에 무게중심의 기울어짐은 당연하다. 신정론을 야기하는 모든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자 한다면, 다른 책을 권하겠다. 그러나 보편성이 담지한 냉정함으로는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을 하나님께 묻고자 한다면, 이 책을 꼽아주겠다. 비록 완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의지할 지팡이 역할은 할 것 같다.

저자는 전통적 신정론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만능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신을 제한하는 전능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힘은 통속적인 전능 개념과 다르고, 무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169). 사랑이신 하나님의 전능은 피조 세계를 내리누르는 초자연적(super-natural) 이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초월적(transcendent) 으로 실행된다. 그러한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 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고통의 무의미함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 안에서만이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는 미래적 현실을 희망할 수 있다(174).

저자는 세월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전통적 신정론과 현대적 신정론 사이를, 하나님의 전능과 무능 사이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가로지른다.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전능과 무능 사이 그 어디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당황스럽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상황이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정작 그 순간 찾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계신다니? 그런 하나님으로 인해 위안이 될 수 있는 걸까? 마침내 승리하게 될 미래적 현실을 견지하더라도, 속 시원한 해갈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제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정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절정 하나만이 아니다. 완성된 그림은 다양한 퍼즐조각을 갖는다. 그 하나 하나의 의미를 새길 때 절정의 모습은 그 의미를 더욱 선명히 한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장사치들에 대해 분노하시는 주님도, 38년된 병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목하시는 주님도, 우리가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더욱이 세월호는 자연재해나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아니라 게으름과 나태함, 부조리의 죄가 만들어 낸 민낯 아닌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향해 가기 전에, 채찍을 꼬신 그리스도, 위선적인 작태 앞에 독사의 자식들이라 일침을 가하시는 그리스도를 먼저 더듬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월호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묻기 전에, 우리의 제자도가 온전한지에 대해 먼저 물어야 순서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침몰하는 세월호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하셨다. 또 지금도 애타게 그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곁에 계신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다. 정작 문제는 주님의 제자라는 교회 공동체가 고통에 대해 너무나 미숙하다는 점이다. 사순절보다 부활절에 친숙한 교회는 고통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사랑으로 자신을 절제하여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는 고사하고, 아픈 마음을 함께 공감하는 능력조차 상실한 듯하여 처참하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책 제목을 곱씹다 뜬금없이 쿼바디스 도미니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베드로의 질문이 연상되었다. 베드로는 수난을 피해 예루살렘 교회를 빠져 나오다가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주님 앞에 쿼바디스 도미니에를 외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는 네가 지기 싫어 도망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기 위해 교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그 한 마디 말씀에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십자가를 달게 진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감히 십자가를 질 수 없다 하여 거꾸로 매달렸다. 오늘 교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베드로처럼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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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 - 그리스도인을 위한 길 위의 신학
요르그 리거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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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 65세 이상 되신 교우들과 함께 2 3일 일정으로 제주도 효도여행을 다녀왔다. 평소 같으면 5월의 한 날을 정해 당일치기 여행을 했을 터인데, 여러 사정을 무릅쓰고 무리를 한 것은 곧 구순(九旬)을 앞두신 한 권사님 때문이었다. 연로하신 권사님은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고단한 일생을 사시느라 이렇다 할 여행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시다. 거동이 점점 힘들어지시는 권사님께 더 늦기 전에 좋은 여행 한 번 계획해드리자는 선의가 모아졌고, 경비 절감을 위해 성수기가 시작되기 직전으로 일정을 잡게 되었다. 잘 먹고 잘 쉰다는 전제 하에 최소한의 경비를 산출하고, 또 그것을 반값으로 낮추기 위한 후원금을 모아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는 은혜의 여행이 꾸려졌다.

그렇게 급조된 13명의 제주도 원정대는 2대의 휠체어를 싣고 제주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특한 생각을 축복하시듯 연일 좋은 날씨를 내려주셨고, 세월의 깊이만큼 주름진 얼굴엔 기분 좋은 봄바람이 스쳐 연일 어린아이 같은 웃음꽃이 피었다. 연세를 생각해서 최대한 일정을 가볍게 잡으면서도 내심 걱정했는데, 그 모든 것이 기우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시는지, 세상의 모든 봄기운을 물려 받은 듯, 잘 드시고 잘 쉬시고 어느 것 하나 놓칠세라 두 눈 가득 담아두시는 모습을 보며, 그 안에는 여전히 호기심 많은 소녀가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지나간 효도여행에 대해 이토록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은 여행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 여행 없이는 그 진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의 말처럼 구약과 신약 성경은 온통 여행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길 위에서 움직이는 신앙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사람들로서 인생을 바꾸는 여정에 합류한 것이다(64).” 특별히 저자는 이 시대의 여행 형태 중 세 가지, 즉 방랑과 이주와 순례에 주목한다. 이 모두는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는 자리이며, 때문에 여행자는 체제에 순응적일 수 없다. 길 위에서 경험하는 여행은 힘과 돈으로 통제하려는 제국주의에 대한 신학적 저항의식을 고양시킨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현대인들의 관광이나 선교 여행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시야가 넓어지고 삶이 변화되길 기대하지만, 정작 변화는 관광객보다 현지인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만 간다(27). 관광산업은 여행의 당위성을 한낱 유흥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여행의 미덕을 환원시켜줄 대안을 찾자고 말한다. 그가 고대하는 것은 정적인 기독교에서 동적인 기독교로, 순응하는 기독교가 아닌 저항하는 기독교로의 회복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해방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는 그의 이력을 볼 때,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성경은 길 위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인가? 정말 그렇다.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체제를 뛰어넘는 자유와 저항정신을 고양시키는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에 동의만으로 끝낼 수 없는 이유는, 여행이라는 담론 자체가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물든 여행의 변질과 그것에 대한 우려는 깊이 공감하지만, 여행의 희로애락을 저항정신 하나에 담아내기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단적인 예로 여행을 대하는 사람의 감정은 저항정신 이전에 흥분이요 설렘이다. 때문에 여행 이야기 자체인 성경에는 그토록 많은 시편들과 자연만물에 대한 경이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때문에 기분전환 용으로 전락한 관광을 우려하면서도, 관광 또한 여행의 한 항목이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저자를 격려한다. 주류 신학이 발견하지 못한 여행 담론을 신학적으로 좀 더 풍성히 발전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여행의 저항정신뿐만 아니라 여행이 간직한 오감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길 바란다. 그래서 새로운 성경 이해로 이끌어 주면 좋겠다. 저항정신만으로 여행을 설명하는 것은 마치 꼬리로 몸통을 흔들 듯, 부자연스러움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영성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기쁨에 대해 말하길, 다른 모든 것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과 같다고 했다. 의미와 목적도 중요하지만, 기쁨이 있어야 사람은 끝까지 갈 수 있다. 마치 마블링이 잘 된 고기가 부드럽게 먹히는 것처럼, 살코기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주도 효도여행을 하는 동안 아침마다 경건회로 하루를 열고, 수요일이 껴 있어서 자체적으로 수요예배를 드렸다.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내내 천국 소망이 가득했다. ‘잠깐 맛보는 여행도 이렇게 경이로운데, 천국에서 마주할 새 기쁨은 얼마나 충만할까?’ 여행은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든 마음을 몰아내버렸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현실과 싸워야 할 이유와 새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과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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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시
스카이 제서니 지음, 이대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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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비전 혹은 소명과 관련된 서적 중 가히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 같다. 지나치게 현학적이지 않으며, 세속적인 욕망을 그럴듯한 신앙 언어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소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통찰력 있는 언어로 제시한다. 20대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소명을 발견하느라 헤매는 수고를 좀 덜 했겠다 싶지만, 지금도 늦지 않다. 모호함은 선명해졌고,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젊은이들과 교우들에게 제시할만한 지침이 생겼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유용하다.

스카이 제서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 대신에 미래도시(Futurevill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가 갖는 판타지적 요소를 걷어내고 현실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미래도시에 대한 이해는 시대적 사조와 더불어 다양한 변주를 겪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미래도시가 더욱 진화하게 될 것이란 낙관적 관점이, 두 번의 대전(大戰)을 겪은 후로는 쇠퇴와 파멸로 나아가게 될 것이란 비관적 관점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한 변주에 따라 교회도 세상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개조하기 위해 힘을 키우고 강제성을 동원하는가 하면, 영속적 진화를 의심하게 된 지금은 이 세상을 저버리고 미래도시로의 탈출을 희망한다. 그러나 진화나 대피의 입장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미래도시의 그림자를 제시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전 몸과의 연속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이전 몸과는 구별되는 몸으로 대체되었다. 미래도시도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따라 연속과 단절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도시를 드러내기 위해 행하는 현재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현재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가치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미래도시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현재의 소명과 맞닿아 있다. 특별히 저자는 청교도들의 소명 이해를 통해 최고 소명, 공통 소명 그리고 특별 소명을 구분한다. 최고 소명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공통 소명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명령들을, 특별 소명은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소명을 말한다. 우선순위는 최고 소명이다. 삶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최고 소명을 따를 때, 다른 소명들도 제자리를 찾게 된다는 저자의 조언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미래도시의 특징으로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풍요로움을 꼽는다. 하나님의 성품에 닿아있지 않는 이 세상의 혼돈과 추함과 결핍은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극복될 것이다. 미래도시를 향한 이러한 상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목적을 고양시키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영속성을 갖는다. 미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과 직결된다. 상상은 결국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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