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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평점 :
책 표지에 그려진 노란 종이배가 위태롭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시퍼런 바닷물에 금방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이
종이배를 살뜰히 들어 올려 얼른 제주항에 옮겨놓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이 책의 부제는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이 문제를 담담히 숙제로 풀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받아 들고 한참을 고민했던 이유이다. ‘괜찮다’ 말하고 툭툭
털고 일어날 아픔이 있고, 오랜 기간 신음하며 끙끙 앓아야 할 고통이 있다. 아직 내게 세월호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애도의 대상이다. 제 삼자인
나도 이럴진대,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은 오죽할까 생각하니, 눈
앞이 또 캄캄하다. 그래서 절름거리는 관점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고,
더 곱씹어야 할 날것의 생각만 종횡무진이다.
이 책은 세월호라는 특별한 사건 안에서의 신정론을
다룬다. 보편적인 신정론의 문제가 아닌, 세월호가 일어난
‘그날’의 신정론이다. 때문에
무게중심의 기울어짐은 당연하다. 신정론을 야기하는 모든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자
한다면, 다른 책을 권하겠다. 그러나 보편성이 담지한 냉정함으로는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을 하나님께 묻고자 한다면, 이 책을 꼽아주겠다. 비록 완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의지할 지팡이 역할은 할 것 같다.
저자는 전통적 신정론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만능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신을 제한하는 전능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힘은 통속적인 전능 개념과 다르고, 무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169). 사랑이신 하나님의 전능은 피조 세계를 내리누르는 ‘초자연적(super-natural) 힘’이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초월적(transcendent) 힘’으로 실행된다. 그러한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 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고통의 무의미함”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 안에서만이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는 미래적 현실을 희망할 수 있다(174).
저자는 세월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전통적 신정론과 현대적 신정론 사이를, 하나님의 전능과 무능 사이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가로지른다.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전능과 무능 사이 그 어디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당황스럽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상황이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정작 그 순간 찾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계신다니? 그런 하나님으로
인해 위안이 될 수 있는 걸까? 마침내 승리하게 될 미래적 현실을 견지하더라도, 속 시원한 해갈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제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정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절정 하나만이 아니다. 완성된 그림은 다양한 퍼즐조각을 갖는다. 그 하나 하나의 의미를
새길 때 절정의 모습은 그 의미를 더욱 선명히 한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장사치들에 대해 분노하시는
주님도, 38년된 병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목하시는 주님도,
우리가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더욱이 세월호는 자연재해나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아니라 게으름과 나태함, 부조리의 죄가 만들어 낸 민낯 아닌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향해 가기 전에, 채찍을 꼬신 그리스도, 위선적인
작태 앞에 ‘독사의 자식들’이라 일침을 가하시는 그리스도를
먼저 더듬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월호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묻기 전에, 우리의 제자도가 온전한지에 대해 먼저 물어야 순서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침몰하는 세월호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하셨다. 또 지금도 애타게 그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곁에 계신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다. 정작 문제는 주님의 제자라는 교회 공동체가 고통에 대해 너무나
미숙하다는 점이다. 사순절보다 부활절에 친숙한 교회는 고통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사랑으로 자신을 절제하여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는 고사하고, 아픈
마음을 함께 공감하는 능력조차 상실한 듯하여 처참하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책 제목을 곱씹다 뜬금없이 ‘쿼바디스 도미니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베드로의 질문이 연상되었다. 베드로는 수난을 피해 예루살렘 교회를 빠져 나오다가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주님 앞에 ‘쿼바디스 도미니에’를
외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는 네가 지기 싫어 도망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기 위해 교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그 한 마디 말씀에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십자가를
달게 진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감히 십자가를 질 수 없다 하여 거꾸로 매달렸다. 오늘 교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베드로처럼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