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 - 1세기 그리스도인은 요한계시록을 어떤 의미로 읽었을까?
데이비드 A. 드실바 지음, 이여진 옮김 / 이레서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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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데이비드 드실바는 신약학자로서 1세기 로마 제국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매우 생생한 필체로 복원했다. 그의 책 제목처럼 책을 펼쳐 든 독자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1세기 에베소 도시 곳곳에 세워진 신전과 신상의 화려함에 놀라고, 왁자지껄한 소리를 뚫고 시장의 거리를 누비며, 곳곳에 흩어져 있던 가정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경험을 맛보게 된다.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라면 분명히 코로나 시대에 이게 웬 호사인가싶을 것이다.


시간여행의 매력을 넘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학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실제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이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교회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실수와 그러한 실수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단번에 깨닫게 한다. 즉 요한계시록을 가장 먼저 접했을 1차 독자들과 그들의 세계를 염두해두지 않는 실수이다. 사도 요한은 분명히 요한계시록을 가장 먼저 읽어야 했던 초대교회의 1차 독자를 누구보다도 염두해두고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독자들은 이들의 세계를 건너 뛰고, 너무나도 성급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현대 세계와 연결 짓기에 급급하다. 그 결과 로마의 교황이나, 중동, 중국, 러시아, 백악관, 유럽연합은 적그리스도가 아닌지 의심을 받아왔고, 시대마다 등장한 다양한 기술들은 - 바코드, 베리칩 심지어 코로나19 백신에 이르기까지 - 곧잘 짐승의 수 666으로 지목 받아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야기의 형식을 빌어 1세기 후반의 에베소에 살던 기독교인들의 삶에 대한 다양한 양상을 들여다 보게 함으로 이들의 삶에 요한계시록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상징들을 이 시대의 어떤 것과 짝짓는 퍼즐 맞추기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한다. 주석방법과 해석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정보를 경험하게 하는 이야기의 힘을 저자는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 건립과 황제 추앙을 위한 행사에 몰두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편승할 때 안녕과 풍요를 약속하는 풍조 속에서,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 무신론자로 오해 받고 일상의 위협을 겪는 공포스러운 상황들은 이야기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게 한다. 황제 숭배에 동참하지 않음으로 매를 맞고도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고백하는 노예 그리스도인부터, 약간의 타협으로 어렵지 않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갈등하는 자유민까지, 심지어 황제 숭배의 제사장으로 일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그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라고 전도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이 등장한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이토록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혼돈 상황에서 요한계시록이 전달되고 가정교회 안에서 함께 읽고 회람함으로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별해가는 모습은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지키는 자가 왜 복된 자인지를 밝힌다.


2천년이라는 시간 간격은 숭배의 대상을 바꾸었을 뿐 세상이 달라진 것은 없다. 저들이 연일 모여 황제 숭배의 방법을 골몰하듯이 오늘 우리는 매일 돈을 추앙한다. 돈이 만능으로 통하고,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 최고이며,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돈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가짜 복음이 통용되기도 한다. 또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경고를 받았던 에베소 교회처럼 진리를 고수하느라 관용하지 못하고 교리에 매몰된 교회의 일그러진 모습도 엿보인다. 당시는 무신론자라는 오해를 받았지만, 지금은 무신론이 대세이며 자기 주도적인 삶이 참된 것인 양 인정받는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변함없는 진리임을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요한계시록은 여전히 경각심을 가질 것과 시대에 순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격려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앙망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말씀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음 속 깊은 갈망 가운데 자신의 소속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백하는 기도가 새어 나온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엇이 새어 나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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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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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때였다. 어떤 이유로 둘째 아들과 야심한 밤길을 운전하고 있었다. 순간 고요한 도로 한쪽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고라니 한 마리가 눈을 밝히며 우리의 존재는 아랑곳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유유히 도로를 가로질렀다. 순간 운전을 멈춘 나와 아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라니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아들과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돌아오는 내내 떠들어 댔다. 고라니 한 마리 마주했을 뿐인 데도 이 정도일만큼, 나는 도시인이다.


그런 나에 비하면 에마 미첼은 자연의 고수이다. 동식물과 광물, 지질학을 연구하는 박물학자이자 디자이너이고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널려 있는 다양한 동식물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다니면서 그동안 내 입에서 한 번도 발음된 적이 없는 다양한 동식물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녀가 산책을 하거나 일부러 찾아가 수집한 꽃과 나뭇가지들, 새의 깃털들은 총천연색 사진이나 감탄을 자아내는 정밀묘사로 다시금 빛을 발한다. 이렇게 화려한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그렇지만 이 책, 읽기에 너무 불편하다. 너무 낯선 동식물의 이름들과 그것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글과 그림만으로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예를 들면, “무지개 빛이 도는 암청색과 검은색 날개, 그리고 레이스 스카프 같은 화려한 머리 깃털더욱 큰 매력은 복화술처럼 들리는 구슬픈 금속성의 울음소리,” 이것은 저자가 댕기물떼새를 묘사한 표현들이다. ‘레이스 스카프 같은 화려한 머리 깃털은 어떻게 생긴 걸까? ‘복화술처럼 들리는 구슬픈 금속성 울음소리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되뇌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한둘이 아니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결국 나는 구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우선 책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들, 저자가 산책한 곳, 혹은 방문한 곳들의 지명이 나오면 구글 지도로 찾아보았다. 다행히 지명이나 동식물의 이름 옆에는 친절하게 영문 표기를 해 놓았다. 출판사의 꼼꼼함을 칭찬한다. 영국 이곳저곳, 주로 자연보호구역이나 호숫가, 해안가 그리고 도로 위의 어느 지점들이다. “이런 곳을 다녔구나!” 자연보호구역은 생각보다 지역이 넓었다. 지도 옆에는 다양한 지역 사진들을 함께 볼 수 있고 360도 동영상도 볼 수 있다. 뜻밖의 정보에 반갑다. 저자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이다. 사진이나 일러스트로 소개 되지 않은 동식물도 검색해보았다. 댕기물떼새의 레이스 스카프 같은 화려한 머리 깃털은 역시나 화려했다. 독특한 모양인지라, 다음에 그 녀석을 만난다면, 나도 자신 있게 댕기물떼새라고 불러줄 수 있을 것 같다. 유튜브의 도움으로 그 녀석의 울음소리도 들어보았다. 댕기물떼새는 실제로 입을 적게 벌리고 울었다. 확실히 복화술하듯이란 표현이 맞다. 이렇게 읽으니, 책을 읽는 속도는 안단테가 된다. 독서가 아니라 산책을 한 셈이다.


내친김에 그녀의 SNS도 궁금해졌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진 그녀의 수집품들은 더욱 놀라웠다. 이런 인스타그램이라니! 그녀가 올린 사진들과 그녀의 털북숭이 친구 애니의 동영상을 한참 들여다보며 즐겼다. 기왕에 방문한 거, 나를 소개하고 그녀의 책을 읽다가 찾아왔다는 것과 그녀를 지치게 하는 고질병, 우울증을 격려하는 글도 남겼다. 분명 그녀도 반가웠으리라.


<야생의 위로>는 산책하는 책이다. 그녀의 열 두 달은 매번 옷을 갈아 입는다. 그녀는 작은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녀의 도움으로 무당벌레가 겨울잠을 모여서 자는지 처음 알았다. 말라버린 풀도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배웠다. 문득 수없이 지나다녔던 북한산 둘레길과 우이천, 중랑천, 그리고 한강 변의 자전거 길을 떠올려본다. 잠시도 귀 기울이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쳤을 변화들에게 미안하다.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들여다봤더라면, 멋진 신세계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책의 안내를 따라가며 내 속에 죽어 있던 관심 세포들이 살아나고 나의 이목구비가 확장되는 느낌이다. ‘산책은 이렇게 하는 거야하고 가르치는 그녀 덕분에, 더욱 깊어 가는 가을 날씨로 인해, 마음은 저절로 들뜬다.


저자는 만성 우울증 환자이다. 심각해질 때면 자살충동에 어쩔 줄 몰라 하다 가도, 작은 꽃과 식물들, 새소리, 우연히 마주한 동물들로 인해 위로를 받고 다시금 힘을 얻는 그녀를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계속해서 우울증과 싸워야 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자연이라는 친구가 버팀목이 되어주니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실히 자연은 치유력이 있다. 꼭 만성 질환 때문이 아니더라도, 밖으로 나서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생긴다. 살을 빼야 한다는 의무감은 내려놓고 가볍게 자주 걸어야겠다. 관심의 주파수를 넓혀서 내 주변의 작은 것들을 들여다 봐야겠다. 도시인도 자연이 주는 선물이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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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복음, 요한계시록
조영민 지음 / 죠이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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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10 29일 새벽 1시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며 사람들을 현혹했던 다미선교회의 포교는 교회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채 해프닝으로 끝났다. 27년이 지난 일이지만 종말론을 말할 때 여전히 거론될 정도이니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이후 꽤 오랜 기간, 한국 교회에서는 종말론이나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교나 강의가 자취를 감추었고, 자칫 종말론의 자만 꺼내도 이단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급적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종말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을 현실 도피자나 광신자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편만하게 되었다. 덕분에 종말론과 요한계시록은 이단이나 교회 밖 어디의 전유물이 되어 무분별하게 인용되고 오용되었다. 단편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숫자 666’은 그 동안 신용카드에서 바코드로, 가장 최근에는 베리칩으로 둔갑해왔다. 볕이 들지 않는 곳에 곰팡이가 번식하듯이, 교회에서 방치된 요한계시록은 교회 밖에서 은밀하게 교인들을 현혹해왔다.

 

다행히 10여 년 전부터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여 전해야 한다는 반성이 교계 안에서 있어왔다.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연구서와 주석들이 나오고, 교회 안에서도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일들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영민의 <소망의 복음, 요한계시록>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 있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장르와 주제를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하며, “요한계시록도 성경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요한계시록이 낯설고 두려운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듯하다. 우선 쉽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법한 낯선 상징과 비유들을 매우 익숙한 용어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오늘을 위한 책으로 읽는다. 성경에서 예언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매우 적절하며, 그런 측면에서 요한계시록을 미래에 일어날 종말 이야기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받아 읽었던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과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비교 대조하여, 오늘을 위한 바른 성경 해석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런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왜 짐승의 숫자 666이 베리칩일 수 없는지, 왜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을 현대 전쟁에서 사용되는 아팟치 헬리콥터로 해석하는 식의 적용이 불합리한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고 설교하게 된 계기를 거론하며, 요한계시록을 배워보지 못했지만, 스스로 연구서를 찾아보고 공부해보니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목회자는 비록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쳐야 할 본분을 맡은 자이다. 그런 측면에서 학자의 마음을 갖고 성경을 대하는 저자의 성장이 기대되며, 곳곳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본분을 지켜가는 목회자들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한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을 위한 신학적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교집이나 간증집 위주의 독서를 넘어, 조금 더 어려운 책도 함께 읽으며 성경을 배워가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엉뚱한 결정과 선택으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영적인 기도 못지않게 지적인 분별력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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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의 삶 -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의 윤리적, 선교적 함의
스캇 맥나이트.조지프 모디카 지음, 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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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관한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쟁점은 유대교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옛 관점은 유대교를 행위에 기초한 종교 체계로 보는 반면 새 관점은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설명한다. 곧 유대교 안에서 개인의 구원은 언약적 선택을 통해 이미 이루어졌으며, 도리어 율법은 선택된 백성이 성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새 관점의 견지로 볼 때, 사도 바울이 싸웠다고 생각했던 옛 관점의 유대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바울에 대한 이해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본서의 부제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의 윤리적, 선교적 함의이다. 새 관점의 견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생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옛 관점은 종교개혁 시대의 구원론에 대한 관심에서 발달하여 이신칭의라는 귀한 가치를 되찾았다. 그러나 칭의 교리를 중심에 둔 개신교 조직신학을 중시하다 보니, 바울의 창의적이고 복합적인 내러티브 신학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경향이 있었다. 새 관점은 이런 측면에서 옛 관점의 부족한 점을 보완 발전시킨다. 곧 성령신학의 이해를 풍성히 하며, 개인 구원을 넘어 교회 공동체라는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새 관점이라는 이름은 이전의 바울 신학이 견지해온 관점을 옛 관점으로 차별화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덕분에 독자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두 개의 관점 중 하나의 관점을 선택해야만 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는 어느 관점이 더 정확한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불러왔다. 그러나 몇 몇 필자들도 강조하듯이 바울에 대한 옛 관점과 새 관점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닌 듯 하다. 1세기 유대교에는 언약적 신율주의와 율법주의가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두 관점을 상호 비교하며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보다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만일 새 관점에 대한 선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스캇 맥나이트의 글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간략하기는 하지만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연구사를 친절하게 집어줌으로 초보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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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202
너대니얼 호손 지음, 곽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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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무슨 계기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래 남자 아이들의 짓궂은 놀이는 같은 학교의 한 여자 아이를 향해 있었다. 어디서부터 그런 이야기가 출발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그리 예쁠 것도, 혹은 그리 미울 것도 없던 평범한 여자 아이를 남자 아이들은 극도로 혐오했다. 그 혐오는 아무런 이유나 근거도 없어서, ‘아무개를 보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그 여자 아이 옆을 지나치며, 저들끼리의 눈짓을 주고 받기 일쑤였고, 어쩌다 그 여자 아이와 마주친 남자 아이들은 교실로 뛰어들어와 자신이 오늘 얼마나 재수없는 일을 겪었는지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러니 말이라도 섞은 날은 오죽했겠는가? 그 여자 아이의 아무것도 아닌 행동은 일종의 해프닝이 되어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곤 했다. 그 여자 아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아이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던 나 같은 아이들도 그저 즐거운 놀이로써 혐오 심리에 동조하곤 했다. 그런 얼토당토 않은 행동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무려 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아이에게 몹시 미안하다. 어느 순간 그 여자 아이도 남자 아이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유별나다는 것을 눈치챘고, 친절한(?) 누군가로부터 자초지종도 들었으리라. 그리고 터무니없는 그 모두를 부정하기 위해 더욱 위협적으로 남자 아이들에게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남자 아이들은 그 모든 저항을 재수없는 여자애재수없는 행동으로 희석시켰다. 하여 여자 아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수없다는 낙인을 안고 1년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여러 번 교실에서 울었던 것 같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나 많이 절망했을까를 생각하니, 못내 미안하다. 어린 남자 아이들의 치기 어린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혹했다.

가슴에 큼지막한 주홍 글자를 안고 평생 살아야 했던 헤스터 프린을 들여다 보며, 잊고 있었던 옛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낙인 찍고 그 틀 안에 가두어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또 그렇게 평가 당하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그러나 그녀는 엄격한 청교도의 윤리가 찍어 놓은 낙인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A’가 진한 주홍 색으로 새겨져 있지만, 그녀는 간통녀의 삶에 저항했다. 인생의 풍랑 속에 난파 당한 사람에게 그녀는 어김없이 긍휼의 손을 펼쳤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주홍 글씨가 간통이 아닌 남을 도울 줄 아는 능력(able)’을 상징하거나 천사(angel)’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순명의 삶으로 주홍 글씨를 짊어지고 살았으며, 그것은 자신의 죄를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들여다 보게 된 덕분이었다. 자신이 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기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상처가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한편, 헤스터가 간통의 죄를 지고 죄값을 치르던 그 순간에 옆 자리를 지켜야 했던 그의 정부 딤스데일 목사는 심약한 마음으로 가장한 자기애로 인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그는 남은 평생을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했고, 그의 심신은 더욱 메말라갔다. 죄책감은 그를 괴롭혔으며, 마지막 순간 그가 사람들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드러내 보인 그의 가슴은 헤스터와 같은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며 상처를 낸 흔적일까? 아니면 내면의 고통이 그의 표면으로 드러나도록 그를 괴롭힌 걸까? 아무튼 제 때 드러내고 회개하지 않은 그의 고통은 헤스터의 것에 못지 않았다. 그 역시도 주홍 글씨를 안고 살았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스 노인이다.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남은 평생을 원수 갚은 일에 빠져 산다. 그의 노년은 악에 사로잡힌 세월로 인해 추하디 추하다. 죄의 압박과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갈등하던 딤스데일 목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많은 사람 앞에서 속죄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칠링워스 노인은 죽어서까지도 복수의 화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용서를 잃어버린 사람이 가장 큰 불행 속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연약한 인간은 저마다의 주홍 글씨를 가슴에 품고 산다. 딤스데일 목사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간통 A자를 가슴에 새겼다. 칠링워스 노인은 분노’(anger) A, 반면에 헤스터는 간통 A라는 낙인을 극복하여 능력의 A, 천사의 A라 여기는 삶을 살았다.

저자는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 글씨는 어떠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죄를 짓는다. 결함이 없는 완전무결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낙인에 순응하여 하찮은 삶에 매몰되어 살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낙인에 저항하고 극복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결국 우리의 가슴에 새겨질 주홍 글씨는 오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느냐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니 마땅한 방향을 향해 힘껏 발을 내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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