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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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많은경우, 소설의 작가는 굳이 머리말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소설로서 말할 뿐,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저들은 머리말에 냉정했고 그것이 저들의 멋이고 맛이라고 생각했다. 김훈은 그 많은 경우를 비껴간다. 서문을 덧붙이고, 굳이 하는 말이라 부른다.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소설의 끝을 찍고, 무심하게 읽었던 그의 하고자 하는 말을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본다. 그는 그때의 고통을, 그때의 절망을, 그리고 희망을 기억하고자 한다. 초판일을 보니 춘사월이다. 그러니 겨우내 말()과 싸웠으리라. 치욕을 견디고 엄동설한을 걸어가야 했던 힘 없는 자들의 눈물을 그도 역시 말로 잡아 꾹꾹 눌러 써야 했으리라. 하여 봄마다 자전거로 남한산성을 다닌 그의 허송세월은 헛되지 않다.

남한산성. 산성의 성질 상 그것은 지키기 위함이다. 1 3,000여 병력과 1 4,000여 석의 양곡이 있던 그곳에서 그들은 무엇을 지키고자 했을까? 소녀는 아비의 흔적 조차 발견할 수 없고, 젖먹이는 얼음판에 내동댕이쳐지며, 혹한으로 손과 발의 마디 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그곳에서, 일상의 평범을 지켜갈 수 없고, 내일의 안녕을 말할 수 없으며, 한 끼 밥을 약속할 수 없는 그곳에서 멋들어지게 굽이치는 남한산성은 부끄럽다. 허물어져가는 명()에 기대고, 시대를 담아낼 수 없는 성리학으로 목숨과 맞바꾼 저들의 행보가 헛헛하여 한참을 웃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수 없기에, 힘 없는 것들은 침묵한다. 소리를 잃어가는 도성은 아득하다. 밖에서 싸워야 할 힘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말로써 말을 겨루는 동안, 힘 없는 것들은 소리를 잃어갔고, 점차 말라갔다. 말 울음소리가 그치고 소 울음소리가 멈추자, 개 짖는 소리도 사라졌다. 닭 우는 소리가 멈춘 그날, 수라상에 올려진 닭다리는 어떤 맛이었을까? 적막이 몰고 온 죽음은 그렇게 조용히 산성에 내려 앉았다.

인조의 이름은 왜 인조(仁祖)인가? 당초 그의 묘호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고쳤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수 없었으며,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인물에게 쓴 어질 인()자가 부끄럽다. 그는 삼경에 중곤을 맞은 수어사를 걱정하고, 사경에 적병을 지나 성에 들어온 계집아이를 생각하여 곶감을 내리는 어진 임금이고 싶었겠으나, 그럴 능력이 없다.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는 지도자의 무능이 그를 어질지 못하게 했다. 삼전도로 가는 그의 걸음에 수치를 느낄지언정,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성벽은 역사의 슬픔을 끌어안고 그곳에 서 있다.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여전히 힘써 지켜야 할 것을 주장한다.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정말 지킬만한 것을 지키고 있는지 물어본다. 짓고 허물고를 반복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헛헛하지 않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키지 못함으로 침묵하는 것들은 침묵하기에 지킬 수 없다. 그러니 걸음을 멈추고 희망을 걸어 자세히 들여다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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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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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조지 오웰, 『 동물농장 』(민음사, 1998)

 

그랬다. 풍차는 날아가고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공들였던 풍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92). 풍차는 꿈에 그리던 세상을 앞당길 그것이었다. 전깃불이 들어오고, 온수와 냉수를 쓸 수 있으며, 각종 연장들을 작동시키고, 노동 시간을 단축하여 더 많은 여가시간을 안겨줄 것이다. 물론 생산성이 늘어 풍족한 생활을 약속해줄 것이다. 그런 꿈을 안고 말발굽이 쪼개지고 온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했건만, 풍차는 날아가 버렸다. 흔적도 없이.

처음에는 우리의 성공을 시기하는 저 인간들의 공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저들과의 <풍차 전투>에서 풍차가 사라지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했다. 망연자실, 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풍차가 있던 자리에 움푹 패인 폭탄 자국은 우리의 땀과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황망했다.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풍차는 인간들 때문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더 특별하다는 천연덕스러운 주장을 묵인할 때부터, 폭력이 토론의 입을 막아버린 때부터, 우리의 자랑스러운 일곱 계명에 조금씩 덧칠을 할 때부터, 짜놓은 우유를 승자독식할 때부터, 저 위대한 <잉글랜드의 짐승들>을 목청껏 부를 수 없던 때부터, 목적을 위해 수단은 어떠해도 된다고 합리화 할 때부터, 집주인 조지가 언제 쳐들어올 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을 때부터, 토론과 비판이 사라지고 맹종만이 강요될 때부터,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그런 때부터 사실 풍차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가는 마차 위에서, 그 마차가 말 도살업 및 아교 제조업의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나의 동료 클로버가 빨리 나오라구소리칠 때야 비로소 나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몸부림을 쳐 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늦은 깨달음은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동물농장,’ 위대한 꿈을 꾸며 달아놓았던 저 간판이 멀어져 간다. 또 나의 꿈도 멀어진다.

이제라도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다르게 살겠다. 무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목청껏 외치겠다. 알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가르치겠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과 토론이 사라진 세상은 결코 우리가 꿈꾸는 동물농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겠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저들은 그저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고, 조심하지 않으면 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며, 잠자코 있으라 말하겠지만, 결코 속지 말라. 너의 무지와 무기력함이 바로 권력의 타락을 가져온다는 점을. 독재는 결코 혼자의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권력에 맹종하고 아부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풍차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힘이 세서 다른 친구 열 명 몫을 감당했던 나 복서는 까마득히 멀어져 가는 동물농장을 바라보며 마지막 필사를 다해 유언장을 남기니, 부디 그대들은 조용히 입 닫고 살지 말라. 소위 중요한 일을 한다는 저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라. 하나의 징조를 통해 열을 내다볼 수 있으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게 하라. 결코 역사를 잊지 말 것과 권력은 특별한 몇 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들! 아무도 아닌 것 같은 그대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두려움 때문에 결코 자신의 권리를 넘겨주지 말라. 그것이 풍차를 되찾는 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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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공감필법 공부의 시대
유시민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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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진짜 공부의 방법

유시민, 『 유시민의 공감필법 』(창비, 2016)

 

불법 유인물을 제작하면서 글쓰기를 배웠다는 저자는 인생의 낙폭이 제법 크다. 학생운동을 하다 징역을 살기도 하고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는 짜릿한 순간도 있었고, 세 번이나 낙선의 고배도 마셨으니, 흡사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생이었다 말해도 좋을 듯싶다. 그런 와중에 먹고 살기 위해 책을 열심히 썼다(본인의 말이 그렇다).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적성에 맞는 것 같지는 않고 역사와 인문학이 더 좋단다. 우물을 깊이 파지는 못했고, 그저 관심을 따라 읽고 쓰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자신의 이력에 무심함을 더한다.

요즘 그는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전업 작가와 TV 방송활동을 열심히 한다. TV에서 보는 그는 좋은 뜻에서 좀 달라진 것 같다 느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싶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상승했고, 그의 정치 후퇴와 함께 추락했다. 자기 딴에는 마음을 다해 좋은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를 지지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낙선 후에 마음의 갈등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때 그는 책을 들었고, 젊어서 읽었던 책이 새롭게 읽히는 경험을 했다고 술회한다. 책은 같은데, 상황이 달라지니 다르게 읽히더라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내가 책을 읽지만, 동시에 책이 나를 읽기도 한다.

한 예로 그는 춘추전국시대 굴원이라는 사람이 쓴 <어부사> 이야기를 꼽는다. 굴원은 백성과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어리석은 왕이 알아주지 않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른다. 죽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어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 세상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세상에 맞춰 살라는 뜻이다. 흙탕물에는 발을 씻어야지 갓끈을 씻으려 하면 안 된다. 물이 맑으면 얼굴을 씻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으면 그만이다. “왜 이렇게 물이 탁해!”하고 원망하거나 비관할 필요가 없다. 젊었을 때는 이 문장이 읽히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읽어보니 다르게 느껴졌다고 술회한다. “,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이것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한다. TV에서 본 그가 조금 변했다 싶은 것은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 여백이었던 것 같다.

공감. 저자가 공부를 위한 독서와 글쓰기에서 꼭 기억하길 바라는 화두이다. 그는 말한다. “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텍스트에 담아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 독서가 풍부한 간접 경험이 될 수 있다. 간접 경험을 제대로 해야 책 읽기가 공부가 된다. 그리고 남이 쓴 글에 깊게 감정을 이입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가상의 독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 자기 생각과 감정 가운데 타인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골라낼 수 있고, 그것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쓰게 된다.”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들어가 감정 이입까지 가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온전한 이해를 통해 더 나은 비평도 가능한 것 아닌가? 책과 같이 천천히 다가오는 소통의 창도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 꽉 막힌 불통의 체증을 무엇으로 치환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공감은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다. 아니, 공감해야 책을 읽었다 말할 수 있겠다. 저자와 대화하고 공감하며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글쓰기도 할 수 있다.

. 글쓰기 비법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몇 가지 자신의 규칙을 꼽는다. 강조했던 규칙은 크게 울림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반면에 지나가며 던지 말이 마음에 꽂혔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 정서적 공감을 일으키는 데 초점을 둔다.” 순간 마음이 뜨끔했다. 때만 되면 어쩔 수 없이 설교를 찍어내야 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메마른 정보를 제공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나의 모습이 스쳤으니까. 그리고 그런 메마름은 정보의 제공 때문이 아니라 실은 내 영성이 찰랑찰랑 하다는 반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그 퍽퍽함을 애써 참아준, 혹은 어쩔 수 없이 바라봐 준 성도들을 축복 하소서.

이 책은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공부의 시대연속 특강에서 했던 강연과 질의응답을 묶은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강연장에 있는 듯 현장감이 있다. 이런 책의 장점은 쉽다는 것 아닐까? 마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과 읽은 책에 대한 소회를 풀어낸다. 큰 부담이 없이 한 호흡에 읽기 적당하다. 그러나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이력과 경험에서 나온 조언은 두고 두고 생각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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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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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신 포도는 무슨 맛일까?

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2016)

 

eBook 한 권을 샀다. 가격 면에서 저렴하고 여러 번 읽을 책이 아니라 생각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구입해 보았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읽고, 북마크도 해보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본전 생각을 어쩔 수 없었다. 구입했으나 산 것 같지 않은 이 기분. 저자의 말처럼 개인 소유가 가능한 책의 특징이 사라져버린, 분명히 소유하고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생경함 때문에 eBook은 아직 내게 신기루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텍스트가 내 학생들의 사고 방식을 규정하는데, 그것은 아무런 닻이 없는 프린터 출력물, 은유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저자의 손에서 나온 원본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프린터 출력물이다. 유령선에서 나오는 신호처럼 그 디지털 사슬은 스크린에서 자의적인 폰트 형태를 이룬다”(181). 1926년은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고,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가 이 세상에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같은 연식의 저자에게 프린트 출력물과 스크린으로 변질된 텍스트는 분명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들처럼 느껴질 법하다.

그러나 저자는 읽는 방식의 이질감에 대해 이것이 결코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12세기에 경험했던 수도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의 변천 과정을 추적하여 책 중심주의 시대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과 다가오는 시대의 읽기 방식에 대해 통찰을 제공한다. 이것을 위해 저자는 12세기 수도자 성 빅토르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을 소환한다. <디다스칼리콘>은 읽기 기술에 관해 쓴 최초의 책이다. 덕분에 우리는 읽는다는 행위가 그 대상이 되는 책의 형태 변화에 따라 어떤 차이를 가져왔는지 살펴보는 독특한 역사를 탐험하게 되었다.

수도사식 읽기. 이것은 12세기 이전의 읽는 방식이며 삶의 방식이다. 후고에게 있어서 읽는 것은 수확하는 것이다. 마치 포도원의 이랑을 거닐며 잘 익은 포도를 따듯이, 수도사는 페이지의 행간을 오가며 지혜를 습득한다. 그것은 단지 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이 시대의 독서 행위와 다른, 낭독하여 스스로 듣게 하고, 여럿이 들으며, 입으로 읊조리는 노동이었다. 그래서 기력이 쇠한 사람은 읽는 것을 절제하는 의사의 처방이 있기도 했다. 다양한 방식의 낭독은 읽는 이의 영혼에 닻을 내리기까지 일체를 이루는 행동이다. 읽는 목적은 지혜를 얻는 것이며 곧 타락한 본성을 치유하는 과정이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존재론적인 치유 크리닉이다.

그런데 12세기에 종이 제조 기술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양피지에 쓰였던 텍스트는 페이지로 형태 변화를 이루게 된다. 착색 잉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학자식 읽기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읽는 것은 낭독이 아닌 소리 없이 읽는 책 중심주의 시대에 친숙한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지혜의 추구는 지식의 수집으로 변화되었으며, 전형적인 읽기 방식의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에도 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읽기 방식의 변화는 권력의 이동도 가져왔다. 12세기 이전까지 통용되던 수도사식 읽기는 성직자들이 시대의 엘리트가 되도록 작동했다. 그러나 학자식 읽기 방식의 등장은 새로운 엘리트 그룹을 불러오게 되니, 서기들이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를, 오직 기록된 말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한다(134). 리더(Leader)는 읽는 자(Reader)라는 말처럼, 읽는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계급을 양태 했다.

수도사식 읽기와 학자식 읽기, 그리고 아직 맛보지 못한 새롭게 등장할 읽는 방식. 책 중심주의 시대에 친숙한 세대에게 프린트 유인물과 스크린이라는 변질된 텍스트는 확실히 낯설다. 그러나 텍스트는 지금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변질되어왔고, 그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독서법이 힘을 얻었다. 저자는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도사식 읽기 방식인 렉티오 디비나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읽는 방식이 힘을 잃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책의 출판과 소유가 용이해지면서 그에 적절한 방식이 통용된 것이리라. 그러니 읽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 수도사식 읽기 방식인 렉티오 디비나가 다시 주목 받는 이유는 더 이상 지식 습득과 수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는 인식 때문이 아닌가? 이 시대는 깊이 있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말처럼 지식과잉 시대에 피로감을 느낀 이 시대는 자신을 인도해줄 통찰의 빛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읽는 방식에 대한 역사 탐구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다가오는 읽기 방식이 낯선 만큼이나 과거의 읽기 방식도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다르고, 읽는 방식이 달랐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같은 포도밭을 거닐지만 수확하는 포도의 맛은 결코 같을 수 없을 것 같다. 맛보지 못한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의 심정으로 묻고 싶다. 새로운 읽기 방식으로 수확한 포도는 어떤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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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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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군가를 위한 썩는 밀알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민음사, 2007)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의 구슬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러하다. 나 하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상호관계 속에서 그 결국을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0세기 문학, 철학, 심리학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는 호들갑스러운 찬사가 과연 그러한지 의구심을 갖고 들여다 본 그의 소설은 사람 사는 세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축소판이다. 이들은 유혹하고 사랑하며 증오하고 분노한다. 비웃고 떠들며 주먹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사랑의 속삭임을 건넨다. 꼬리가 꼬리를 물 듯, 얽히고 설킨 관계 속을 따라가다 보니,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혹은 정의 내리지 못했던 이들의 속마음이 이해가 되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겹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내게 친절하지 않다. 하나같이 수다스러운 등장인물들 때문에…. 더욱이 말문이 터졌다 하면 숨도 안 쉬고 몇 장씩 넘어가는 독백 같은 대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쫓아가기에도 숨찼다.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던데, 도대체 이런 엄청난 대사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싶은 생각에, - 보지는 못했지만 - 배우들도 내 마음 같지 않았을까? 원래 사람 만나는 일에 피로함을 쉽게 느끼는 성정인지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모임이 끝나길 기다리는 내 본심을 책을 읽으면서도 느끼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저자는 성경에서 가져온 한 구절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방인 몇 명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소설 전체의 내용을 갈무리하는 이 말씀은 결국 죽어야 살고 살고자 하면 결국 아무런 열매도 없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죽음이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라는 이 모순은 머리 속으로는 그럴듯하지만 몸으로 살아내기란 여간 내기가 아니다. 그래서 현실 세계의 보편적인 방식은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싸우며, 성취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저 죽으려고만 한다면 결코 얻을 것이 없다는 식이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모두에게는 어리석을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관계는 하나같이 불편하다. 돈으로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의 관계가 슬프고, 치정극으로 치닫는 이들의 모습이 불행하다. 서로를 모욕하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휘둘러대는 돌무더기로 인해 아프다. 폭력 앞에 아이가 학살을 당하고, 영웅이 되어야 마땅한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된다. 모두에게 추앙 받던 이는 이내 의심과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썩는 밀알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흥미롭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알료샤를 꼽는다. 책 서두에서 그는 알료사를 나의 주인공이라 부르며, 그의 주인공됨을 끝까지 신신당부한다. 주인공 같지 않아 보이겠지만, 그래도 주인공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실제로 카라마조프 가의 셋째 아들인 알료샤는 주인공답지 않다. 큰형 드미트리처럼 열정적이지도 못하고, 둘째 이반처럼 아버지를 살해할 만큼 강렬한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에 비하면 알료샤는 자기 주장도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동조하는 나약한 인물처럼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알료샤를 유로지비라고 부른다. 유로지비(iuroduvyi)를 굳이 번역하면, ‘성스러운 바보(holy fool)’ 쯤 되겠다. 이들은 자기 이득을 좇지 않고 무기력할 정도로 자신을 내팽개치는 존재.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 전혀 욕심이 없고 의식주 문제마저도 무심한 존재이다. 그러니 자신의 궁핍을 해결하고자 남을 해코지하는 일도 없다. 욕심이 없어 마음이 가난하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질서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유로지비의 삶을 사는 모습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하는 썩는 밀알’, 결국 세상 법칙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방식을 사는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알료샤는 주인공 같지 않지만, 결국 가장 주인공답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얽혀 있다. 영향을 주고 받으며 괴로워하고 기뻐한다. 이반 때문에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동력을 얻는다. 반대로 이반은 스메르자코프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는 이성의 초라함을 깨닫는다. 드미트리는 처음에는 그루센카의 성적 매력에 매료되었지만, 나중에는 그녀의 순수함에 끌려 참된 사랑을 깨닫는다. 결국 이것이 동력이 되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 죄의 처벌을 달게 받는다. 계산적이고 냉소적인 그루센카는 어느 순간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순정파가 된다. 그런 그루센카로 인해 실의에 빠진 알료샤가 새 힘을 얻기도 한다. 일생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한 순간 마주한 유로지비의 경험이 이들을 변화시킨다.

복잡하게 얽힌 인생사. 그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서 어떤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눈물과 분노가 될 수도, 혹은 소망과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썩는 밀알이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주인공답지 않은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그렇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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