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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평점 :
여우의 신 포도는
무슨 맛일까?
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2016)
eBook 한 권을 샀다. 가격 면에서 저렴하고 여러 번 읽을
책이 아니라 생각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구입해 ‘보았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읽고, 북마크도 해보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본전 생각을 어쩔 수 없었다. 구입했으나 산 것 같지 않은 이 기분. 저자의 말처럼 개인 소유가 가능한 책의 특징이 사라져버린, 분명히
소유하고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생경함 때문에 eBook은 아직 내게 신기루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텍스트가 내 학생들의 사고 방식을 규정하는데, 그것은
아무런 닻이 없는 프린터 출력물, 은유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저자의 손에서 나온 원본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프린터 출력물이다. 유령선에서 나오는 신호처럼 그 디지털 사슬은 스크린에서 자의적인 폰트 형태를
이룬다”(181). 1926년은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고,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가 이 세상에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같은 연식의
저자에게 프린트 출력물과 스크린으로 변질된 텍스트는 분명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들”처럼 느껴질 법하다.
그러나 저자는 읽는 방식의 이질감에 대해 이것이
결코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12세기에 경험했던
수도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의 변천 과정을 추적하여 책 중심주의 시대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과 다가오는 시대의 읽기 방식에 대해
통찰을 제공한다. 이것을 위해 저자는 12세기 수도자 성
빅토르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을 소환한다. <디다스칼리콘>은 읽기 기술에 관해 쓴 최초의 책이다. 덕분에 우리는 읽는다는 행위가 그 대상이 되는 책의 형태 변화에 따라 어떤 차이를 가져왔는지 살펴보는 독특한
역사를 탐험하게 되었다.
수도사식 읽기.
이것은 12세기 이전의 읽는 방식이며 삶의 방식이다. 후고에게
있어서 읽는 것은 수확하는 것이다. 마치 포도원의 이랑을 거닐며 잘 익은 포도를 따듯이, 수도사는 페이지의 행간을 오가며 지혜를 습득한다. 그것은 단지 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이 시대의 독서 행위와 다른, 낭독하여 스스로 듣게 하고, 여럿이 들으며, 입으로 읊조리는 노동이었다. 그래서 기력이 쇠한 사람은 읽는 것을 절제하는 의사의 처방이 있기도 했다. 다양한
방식의 낭독은 읽는 이의 영혼에 닻을 내리기까지 일체를 이루는 행동이다. 읽는 목적은 지혜를 얻는 것이며
곧 타락한 본성을 치유하는 과정이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존재론적인 치유 크리닉이다.
그런데 12세기에
종이 제조 기술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양피지에 쓰였던 텍스트는 페이지로 형태 변화를 이루게 된다. 착색 잉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학자식 읽기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읽는 것은 낭독이 아닌 소리 없이 읽는 책 중심주의 시대에 친숙한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지혜의 추구는 지식의 수집으로 변화되었으며, 전형적인 읽기 방식의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에도 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읽기 방식의 변화는 권력의 이동도
가져왔다. 12세기 이전까지 통용되던 수도사식 읽기는 성직자들이 시대의 엘리트가 되도록 작동했다. 그러나 학자식 읽기 방식의 등장은 새로운 엘리트 그룹을 불러오게 되니, 곧
‘서기’들이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를, 오직 기록된 말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한다(134). 리더(Leader)는 읽는 자(Reader)라는 말처럼, 읽는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계급을 양태 했다.
수도사식 읽기와 학자식 읽기, 그리고 아직 맛보지 못한 새롭게 등장할 읽는 방식. 책 중심주의
시대에 친숙한 세대에게 프린트 유인물과 스크린이라는 변질된 텍스트는 확실히 낯설다. 그러나 텍스트는
지금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변질되어왔고, 그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독서법이 힘을 얻었다. 저자는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도사식 읽기 방식인 렉티오 디비나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읽는 방식이 힘을 잃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책의 출판과 소유가 용이해지면서 그에 적절한 방식이 통용된 것이리라. 그러니
읽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 수도사식 읽기 방식인 렉티오 디비나가 다시
주목 받는 이유는 더 이상 지식 습득과 수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는 인식 때문이 아닌가? 이
시대는 ‘깊이 있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말처럼 지식과잉 시대에
피로감을 느낀 이 시대는 자신을 인도해줄 통찰의 빛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읽는 방식에 대한 역사 탐구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다가오는 읽기 방식이 낯선 만큼이나 과거의 읽기 방식도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다르고, 읽는 방식이 달랐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같은 포도밭을 거닐지만 수확하는 포도의 맛은 결코 같을 수 없을 것 같다. 맛보지
못한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의 심정으로 묻고 싶다. 새로운 읽기 방식으로 수확한 포도는 어떤 맛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