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해 수도암에서 하룻밤 묵을 때 일이다. 어스름이 사위에서 밀려오고 내가 머물던 객사에는 3무(텔레비전, 신문, 전화)의 세계 속에 침묵만이 흘러 넘쳤다. 그 때 내가 들은 것은 스님의 독경소리도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아니었다. 휘영청 밝은 달 때문에 문을 열어보니 멀리 수도승의 삼천배하는 모습이 들어오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 내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희덕의 <어두워진다는 것>에서도 무수한 소리의 향연과 그 소리에 귀 기울일줄 아는 겸손한 마음과 내면의 충일함이 느껴진다. 시적화자가 듣는 소리는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상수리나무 검은 숲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 철원 들판을 건너는 기러기떼의 날개로 노젓는 소리, 승부역 마른 꽃대들의 싸드락거리는 소리에서 병을 막 알았을 때와 죽음을 앞둔 울음소리까지 다양하다. 그러한 소리는 어떻게 들리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사물과 생명체를 바라보는 자애로운 눈빛을 가져야함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 시적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보면 마사목에 친친 감겨 신음하는 어린나무가지부터 밤늦게 돌아온 남편의 옷에 이르기까지 안쓰러움에 못이겨 저녁이 되면 모든 신체의 모든 부위가 조금씩 아파오는 찢겨진 몸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이전의 시에서도 그런 흔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업가장이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를 기다리는 애처로운 모습을 담은 「못 위의 잠」이나 물끄러미 화자를 바라보는 다람쥐의 그 맑은 눈빛 앞에서 그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도는 「어린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세상 잡다한 번뇌로 인해 심안이 맑지 않으면 사물과 뭇생명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도 없고 또 듣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연의 사원으로 들어간다고 보들레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시인은 신들과 숲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에게 전언을 한다.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시적 화자는 대상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뭇소리를 감별한다. 그 소리를 듣노라면 어느새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틈 하나가 보이고, 그 속에 우리의 자아가 어둠 속에 가녀린 불빛으로 흔들리며 나타난다. 이 시집을 읽으며 소리를 감별하는 섬세한 감정의 파장이 옹달샘의 파문처럼 바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오월, 북한강 물 자락에 곱게 드리워진 수입리 잣나무 숲길처럼 눈이 푸르도록 시린 한 떼의 언어가 내 마음속에 길게 성호를 그린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강가에 그물을 가득 싣고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일 것이다.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에서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고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일까?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위의 흉터'는 부드럽게 너울지고 강가를 오가는 뱃소리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짙푸른 강물 속에 눈발처럼 꽂힐 것이다. 하루종일 강가에 나가 물수제비를 뜨며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을 사랑해야 되는 것일까?

장석남의 시는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처럼 우리들 곤한 감성에 언어의 실루엣을 입힌다. 그 실루엣은 '내가 보았던 구름의 자국'같이 '눈감았다 떠도' 그리운 버드나무 마른 시냇가, 수묵의 정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삶은 저렇듯 명료한 것도 아니니' '너에게 하는 말처럼' 또 '蕭瑟히 희미해지는 걸음'처럼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옷고름처럼' 마음을 질러 흘러가는 것.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우리 손안에 밧줄로 감긴다. 그것은 잔잔한 강가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우리들 감성에 울렁이는 또 다른 실루엣일 것이다. '둥글게 흰 풀잎'처럼,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처럼,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처럼 '먼 훗날 살 집을' 귀담아들어보는 감성의 실루엣일 것이다.

하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그러한 실루엣이 못물소리처럼 소슬히 희미해지는 메아리가 아니라, 갈라진 짙푸른 물위의 흉터처럼 우리들 가슴에 영원토록 남기에는 아직도 건너야할 강들이 많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 인간 흙 상상력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삼인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책을 처음 대하게 된 동기는, 생태학적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문학비평에 대한 관심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종종 녹색문학이니 생태문학이니 하는 말들을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그게 다 입빠른 소린줄로만 알았다. 아직도 현실과 문학이 관계 맺는 방식 중에서도 사회학적 관점이 여타의 다른 관점보다(비록 그게 생태학적 관점이라할지라도) 더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경직된 사고였는가는 이 책의 김용택론 부문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글의 내용 중 김용택 시인의 '뒤를 보며'라는 시에서, 시적화자가 휘영청 밝은 달밤에 강가 언덕에서 뒤를 보는데, 갑자기 뒤가 스멀거려 돌아보았더니 바로 달빛이 자기 엉덩이를 비추고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걸 두고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지금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한가하게 달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필자 역시 김명인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김종철 교수의 글을 읽으며, 이게 얼마나 문예과학적인 경직된 태도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인간도 사회구성원이기 이전에 자연 생태계의 일부란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정작 문예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인간과 사회에 있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간파할지언정 인간과 자연의 상호교감에까지는 사고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후자없이는 전자도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종철 교수의 이러한 생각이 어찌보면 공상적이고 감상적인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녹색평론에 몸담으면서 머리로만 하는 생태론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즉 행동하는 실천을 담보로 하는) 생태주의자란 걸 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른 바 시민운동을 한다하면서 오히려 국민과 시민연대에 큰 실망을 안겨주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이 시민운동의 본질 추구보다는 개인의 사심이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면 우리는 이상과 실천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 없이는 우리는 미래를 향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며, 앞으로 녹색평론과 김교수가 고민해야 할 부문도 그러한 실천을 담보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될 것이다. 아뭏든 이 책은 인간의 사고를 '인간을 위한 사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자연과 인간은 결코 양립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라는 데까지 안목을 이끌어올린 뛰어난 저서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 하늘연못 평론선 3, 정끝별 평론집
정끝별 지음 / 하늘연못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마지막 부문인 <그리움의 불멸화와 반복의 미학>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하여 첫 부문인 <시의 주술성과 시인의 운명적 선택>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대개 문학평론가의 비평문은 작가 나름대로의 비평적 안목과 기준에 의해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꼭 그것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순 없을지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에 대한 접근이 근원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끝별의 글은 작가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꼼꼼하고 다양한 시읽기'로서 '시자체가 <천 개의 혀>를 가진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서 '그에 걸맞는 <천 개 이상의 혀>를 가진 언어여야 한다는 보다 열린 비평적 태도'에 입각한 평론이다.

먼저, 제2부에 실린 글들은 작가의 주관적 생각과 판단을 가급적 자제하면서 작품의 본질과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데 충실한 비교적 꼼꼼한 시읽기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무 난해하지 않고 비교적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1부에 실린 글들은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접하고서 그 유사성과 공통점을 바탕으로 쓴 주제별 비평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독서 경험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저자는 왕성한 글쓰기 못지 않게 여러 시인의 작품을 통독하여 그 성실성이 본서에서 단연 돋보인다.

하지만 이제 이 책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평론의 생명은 작품에 대한 이해와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가에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이든 부정적인 평이든 평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2부에 실린 글 어느 곳에서도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작가의 부족한 점에 대한 충실한 비평을 찾아볼 수 없다. <열린 비평적 태도>란 모든 것을 긍정적인 면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텐데 평가할 부문에 가선 비평가가 갖는 특유의 예리한 통찰력과 판단력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예를 들어보면, 먼저 <무덤 위에서 덜그럭대는 그로테스크 시학(남진우론)>에서 작가는 '그의 시편들 역시 죽음에서 삶의 분출을 느끼게 하고 삶으로부터 죽음의 폭력성을 느끼게 한다. 죽음이 삶과 이어져 있으며, 죽음은 삶의 표징이자 무한한 삶에 대한 열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269면).'고 말하는데, 여기서 남진우에 대한 고은의 다음 글을 읽어보자.

'더욱이 여기저기서 생명만을 얘기하고 노래하고 외치는 생명지상주의의 시대에 그런 생명의 비의(秘義)조차 경건하게 껴안은 죽음에의 충실한 탐구가 있다는 것은 남진우가 한 역할 이상일 터이다. 시집 속의 어느 시 한편도 거의 실패작이나 타작이 아닌 것이 이 시집의 ‘불운’이다. 아니 이런 평범한 찬사보다 이들 시편 하나하나가 유지하고 있는 예리한 경건성과 과장되지 않는 진정성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탐미까지도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한다.(『창작과비평』, 1996년 겨울호)'

여기서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나름대로의 평가가 들어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막연한 작품에 대한 미화가 아닌 그 전반에 대한 것이다.

끝으로, 제1부 <영화에서 상상력을 베끼는 시인들을 믿느냐>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믿는다. 장정일에서 강정에 이르는 영화 마니아들, 영화에서 시적 상상력을 베끼고 있는 시인들이, 아직까지는 시인의 책무에 성실히 복무하고 있다고'. 그런데 이광호는 '키치가 문학적 양식과 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키치의 문학적 기원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적 자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근거에서 키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장정일이 시인으로서 책무에 성실히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저자의 <열린 비평적 태도>가 작품 평가의 안목을 겸비한 업그레이드된 비평으로 발전하여 20세기 평단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소중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창비시선 198
조용미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용미 시는 사물과 대상의 '현상학적인' 관찰에 대해선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인의 입장에 대해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먼저 시적화자가 바라보는 사물과 대상엔 피상적으로 보이는 가시적 영역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영역까지 그 내면을 마치 스테레오 촬영하듯 섬세한 관찰이 묘사되어 있다.

먼 길들이 물에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산에서 들고 온 동백 두꺼운 잎의 맥을 짚어본다
꽃살문 저쪽은 내가 걸어들어갈 수 없는 곳, 연꽃무늬와 국화무늬의 분합문 사이를 서성이며 내가 본 것은 그 속의 동백잎보다 더 두터운 환한 어둠, 산에서 돌아온 후로 자주 새벽예불 소리를 듣는다 --<동백의 맥을 짚어본다> 부분

여기서 '동백잎'이라는 대상을 살피는 방법으로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이 동원되며, 나중엔 청각을 통해서 동백잎의 이미지를 환원시키고 있다. (새벽예불 소리→꽃살문→동백잎) 또 대상과 시적자아를 객체/주체의 관계가 아닌 주체/객체의 입장으로 바꾸어 대상의 실체에 접근하는 예는 <오동나무를 바라보는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동나무 아래 오래 서 있어/내가 오동의 풍경이 되고자 했다/누가 천산산맥을 하늘에서 보았다고 했을 때/내 몸이 천산북로로 눕는 것을 꿈꾸었듯' 그 외 '존재의 시간성'을 탐험하는 '사막의 입구인 사강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법/제부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내 한해를 물어보았던 날 저녁(<사막의 입구인 사강에서는>)'은 웅숭깊은 삶의 성찰이 여울져 흐른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시를 위해 존재하면서도 자연스레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창이 될 순 없을까. 여기서 구태의연하게 순수/참여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 나라는 유독 현대사의 질곡이 많은 나라가 아니었던가. 오늘의 시가 당대 현실 모습에 대해 동시대 사람과 같이 아파하고 그들의 상처를 싸 매어줄 수 있는 위안과 희망의 시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만약 시가 애써 이런 역할을 외면하고 시 자체에 안주하려고 들면 사랑 없이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않을까. 여기 소개하는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全琫準>은 앞서 언급한 내용에 부합되는 대표적 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면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서울로 가는 全琫準> 전문

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