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살구꽃이 돌아왔다 창비시선 299
김선태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빗살로 빚어낸 곡선의 말들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도 추모 열기는 맹위를 떨어뜨리지 않고 있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노대통령이 남긴 유언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김선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살구꽃이 돌아왔다』에서도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노래하는 작품이 눈에 많이 띈다. 먹이사슬은 대자연의 진리다. 한 개체의 소멸은 다른 생명의 몸에서 다시 잉태되어간다. “독수리 날개를 빌려 타고 하늘을 훨훨”(「조장(鳥葬)」) 날아가기도 한다. “비극보다 황홀이 숨쉬는”(「황홀」)자연 속 세상에서 “정(靜)과 동(動)이 내통하는 허공의 정물화 한 점 살아 있는 정물화 한 점”(「벌새」)이 탄생한다. 생과 사를 둘로 갈라보면 “자궁 같기도 하고 무덤 같기도” 하며 “한쪽에 태아가 한 쪽에 노인이 누워 있”(「감씨」)는 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도 “침울하지 않았다, 평온했다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었다.”(「조장(鳥葬)」) 이전에 발간된 시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이 가슴 아리도록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선태 시인은 “결국 다시 살구나무 아래로 돌아”(「행화」)간 셈이다. 시집의 표제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연유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과 사에 대한 시인의 사유를 거슬러 가면 거기엔 소멸되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배여 있다. 그런 심상의 풍경들은 바로 가지 못하고 “칙-칙-폭-폭 달고 지나가는 완행열차의 풍경”(「농업박물관」)처럼 곡선의 말이 되어 우리 곁에 되돌아온다. 우리 삶의 지천에 버려진 곡선의 말을 보듬고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모습이 대자연 속에 클로즈업 되는 듯하다.

 한편 시집의 주된 소재 중의 하나는 ‘바다’이다. 시인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한 바다는 갯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곳이다. “일몰의 수평선 너머로 붉디붉은 가락 하나가 저”(「서해에서」)물면,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조금새끼」) “사람들의 운명이 죄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린 배를 달래며 쭈구미 쌀밥으로 소원을 풀던 바닷가 사람들이며, 고통스런 삶을 제 삶처럼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모습들이 잘 삭은 절창으로 묻어난다. 때로는 “저 징그러운 파도소리에 몸서리”치며 “극단의 고독과 불행에 몸써리치”(「자산어보」)는 “지금껏 살아온 날들과 과감히 결별하”(「낚시유배」)는 아름다운 최후까지도 가슴 저미도록 다가온다. “한동안 바다가 끼고 있는 섬들과 갯벌과 물고기와 어민들의 삶과 친해지고 싶”다던 작가의 말처럼 바다는 시인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Heimat)인 셈이다. 그 고향을 향해 시인은 “정중동의 느린 중심”(유성호)으로 일관하며 가고 있다.

  이번 시집이 이전에 비해 삶의 깊이와 성찰을 통해 소멸해가는 것과 자연에 대한 따스한 눈길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들이 많다면, 일부 서사적 틀을 갖는 시에서는 시적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며 절제미가 결여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띈다. 변방을 거처로 한 시인의 삶과 예술이 일국을 넘어 세계로 웅비하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이성부 시인이 『지리산』이란 시집을 세상에 내 놓았을 때, 보자기에서 함께 뛰쳐나왔던 말, <빗점골>, <양수아>, <정순덕> 그 이름을 떠올리며 오늘은 내가 『이현상 평전』의 높드리를 넘는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을 만났지만, 이현상처럼 지조와 절개를 끝까지 굽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민과 조국을 위해 한평생 삶을 살다간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갖는 빨치산 투쟁가 이현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 이현상이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노동운동가로 사회주의자로 그전부터 눈부신 활약을 해 왔음을 말해준다. 어제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듯이 빨치산 유격대는 항일 유격대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 현대사의 질곡인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 사람이 자신이 믿는 세상을 위해 얼마나 아름답게 투쟁했는가를 말한다. 어느 누구인들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고 자기 몸이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이현상처럼 일제의 모든 고문과 억압 속애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사실 우리 현대사는 해방의 기쁨도 잠깐 대일협력자(친일파)를 청산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오히려 그들의 의한 위기를 맞는다. 대일협력자들은 일본에 이어 미국에 빌붙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무자비한 반공정책과 조국통일을 바라는 이들에 대한 인권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빨치산 유격대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국 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했던 사람들이며, 해방이후에도 남북한 분열보다는 하나 된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단선반대와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념 투쟁에서 자본주의 경제논리를 펼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으로부터 비주류 세력으로 서서히 몰리기 시작했고, 남한 내 그들의 투쟁은 한국전쟁이 종료된 후에는 더욱 입지가 어려워졌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모든 것을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다. 피아간 이념 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영혼들이야말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의 숭고한 뜻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정식적인 재판이나 절차 없이 사적인 감정과 보복에 의해 숨졌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자 앞으로 진상을 규명해야 할 우리의 숙제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현상의 빨치산 투쟁에 대한 시간적 경과를 따라 그의 활동상을 기록했지만 인간적 측면 또한 부각시킨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지도자로서 동지로서 형제자매로서의 인격과 성격을 묘사한 이 책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가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인간 이현상에 대한 소상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의 사소한 잘못과 흠도 우리는 예외 없이 이 책을 통해 본다. 하지만 이 땅에 어느 누가 그의 잘못에 대해 돌을 던질 만큼 나라와 인민을 위해 투철한 삶을 산 사람이 있는가 자문하고 싶다.

 또 한가지 책 내용 중에서 여순사건을 ‘여순반란’이라고 명기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저자는 이현상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의 지시 없이 자의적으로 봉기하여 인민의 혁명 역량을 소진하였기 때문에 해당적 행동이자 반동적 봉기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명명한 것 같은데, 이는 이승만정부가 여순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에 주목하기보다는 정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사건으로 보고서,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개해 가기 위해 사용되었던 용어와 중복되기에 읽는 관점에 따라서는 다소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현상, 그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죽음과 위협 앞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성품은 직선처럼 강직했지만 인민을 향한 애정과 헌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투철했다. 그의 삶의 여정은 한뉘 부드러운 직선 쪽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매스컴에 의한 광고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사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현대사에 대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책에 대한 체계적 비판을 시도한 글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도중 “창비”에서 최원식 교수가 이 책에 대한 글을 쓴 걸 보고 필자가 읽은 느낌과 비교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박지향 교수의 머리말이나 이영훈 교수의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라는 글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나타난 복잡하고 다양한 논의의 층위를 단순화시켜 너무 무리하게 일반화시키는 경향도 있다고 본다. 2권 마지막 대담 내용도 편자들이 기존의 민중중심사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대항논리로 맞서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역사를 바라보는 ‘여러 잣대’를 얘기하며 정작 민족이라든가 통일이라는 잣대만큼은 냉정하다 못해 냉혹하리만큼 거부적 반응들이다. 이에 대한 편자들의 포용과 이해가 아쉬울 따름이다.

 필자가 읽기엔 주익종, 이철우, 김낙년 교수의 글이 기존의 생각을 재고하게 하는 좋은 글이었다고 본다. 특히 소정희 교수의 글은 한국정신대연구소가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증언집 세 권을 다 읽은 터라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지만 내재적 요인으로는 유교문화적인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을 꼽을 수 있고 근대화에 대한 억압된 개인의 욕망이 자초한 결과라고도 생각한다. 미공개된 수기지만 당시 징용에 끌려갔던 한 사람이 쓴 글에도 위 사항을 입증하는 내용이 있어 몹시 놀라웠다. 50년대를 분석한 유익종의 글은 다소 논거가 부족하지 않나 싶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모순과 문제점들이 일차적으로는 외세나 일본제국에 있지만 우리 내부에 대한 문제점도 밝히려고 한 점이 단연 돋보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진보 진영세력이나 단체들도 내부의 통렬한 자기비판 없이는 국민의 어떠한 지지도 받기 어렵듯이 학문하는 사람도 진리는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그것이 반증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진리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문제점은 있지만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서 각 필자들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선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고 또 수용해야 할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질무렵 무라사키
히구치 이치요 지음, 박영선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히구치 이치요의 <해질 무렵 무라사키>를 읽으며 프랑스 근대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발자크(1799~1850)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는 <고리오 영감>, <외제니 그랑데> 등이 실린 『인간 희극』등 불멸의 명작을 발표하며, 당시 프랑스 사회의 내면적 모습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가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때는 신문 등장으로 신문이 작가들에게 소설의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전업작가 시대의 시작을 예고했던 시대였기도 합니다.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사회의 근대적 풍경과 인간 내면의 심리를 밀도 있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발자크와 유사하고 아사히신문 등 신문연재 소설이 등장했던 시대 상황도 매우 흡사합니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이 오늘날에 읽혀도 현대소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점은 무엇보다도 근대적 정신에서 탈피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 소설 내용인 계몽사상이나 도덕성 또 국가관 대신에 지극히 개인적 문제들- 부부갈등이나 이혼 문제 등-이나 기존의 도덕적 체계나 사회적 형태를 초월-불륜에 대한 성찰 등-하는 내용이 소설의 주된 소재로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해질 무렵 무라사키>는 미완의 작품이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뛰어넘어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해보려는 시대적 여성의 고뇌와 갈등이 잘 묘사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가 개인의 영혼이나 정신을 억압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보여줌으로써 사회 제도의 허구성을 비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십삼야>와 <제 아이는 말이죠>는 현대 사회에서도 문제시되는 가정 붕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호감이 가는 작품인데, 당시로선 말하기 힘들었을 부부간의 갈등이나 대화 단절이 가정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줌으로써 이를 전통적 현모양처의 태도로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틀을 깨뜨려 버리고 어떤 대안을 모색할 것인가 독자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는 작품이기에 근대소설의 범주를 넘어 현대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는 귀중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키재기>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 같은 성장 소설로서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그 시대의 상황을 또래집단의 힘겨루기나 이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통해 애잔하게 묘사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적 작가 시점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디테일 면에서는 지금처럼 다양하고 긴장감 넘치는 소재가 아니기에 다소 느슨한 느낌은 들지만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소설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매미>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 있어 작가의 절제미와 소설의 복선적 기법을 충분히 살린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정신적 외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주인공과 그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두 남자의 시선에 의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데,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의 질곡이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번역도 충실-역자는 일본문학을 전공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해서 우리 글로 읽어도 아주 무난한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독자님들의 일독을 적극 권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지인에게서 이 책을 읽어 보란 얘기를 들었다.전에 전경린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터라, 기대하는 바가 컸다. 이 작품이 비록 불륜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사랑의 본질을 묻는 소설적 진실을 담고 있음엔 틀림없다는 게 지인의 말이었다.

우선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 통속적이란 말은 이 작품이 갖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심오한 질문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사회 구조 간의 매커니즘에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질서가 투영되어 있는데, 우체국장과 미흔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전근대성을 읽을 수 있다. 뿐만아니라, 미흔이 외도하게 되는 연유를 효정의 부정에서 찾고 있다.

남편의 외도로 충격을 받은 미흔이 시골에 내려와 생활하는 도중 '규'라는 남자를 만나 '구름모자 벗기기 게임'을 하다가 육체적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소설의 발단부터가 작위적인 요소가 많아 리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애소설'이라면 '실낙원'(와타나베 준이치로)처럼 주인공에 대한 탁월한 심리 묘사가 수반되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게 이 작품의 한계이다. 여기서 '생명의 요청으로서의 '몸'의 부름에 응하는 한 인간의 삶은, 그 삶이 실제로 뿌리박고 있는 현실과 역사의 공간에서 풀려'(윤지관)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통속적으로 전락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한 인간의 자기파멸적인 정열의 탐닉과 그것으로 야기되는 삶의 불화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적당히 사랑하다 시간이 경과되면 다시 원래의 가정생활로 돌아오는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이 아니라 치유할 수 없는 개인과 가정의 상처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보듯이 주인공을 죽음에 몰아넣지 않는 극적인 반전은 그런 사랑의 결과로 인해 기존의 인습에 대해 온몸으로 거부하는 문제제기적 주인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비록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지탄 받는 사랑이지만 거기서 낭만적 자아가 찾고 갈구하는 사랑의 참모습은 인습을 뛰어넘어 몸으로 감지되는 열정의 흔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사랑의 열정이 파괴를 통한 생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우화적인 배경의 설정에서 보듯이 역사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져 열정의 사건은 일정한 시공간에서 언제나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이야기로 나타난다.
또한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모색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경린 소설의 한계는 '삶'의 문제가 지극히 개인적 체험으로 환원된 나머지 사회적 싦과의 연관에서 뿜어져나오는 생동감이 없다는 게 평론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전경린의 폐쇄적 세계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데, 앞으로 작품에선 삶의 뿌리로서 사회와 역사적 국면에서 좀더 구체적인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부 평론가들이 말하는 '본격문학 외양을 두룬 함양미달의 낯뜨거운 연애담'이란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존 우리 사회에서 규범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했던 것들에 대한 도전으로서 작가는 삶의 평온함에 깃든 불온한 것들의 정당한 자리매김을 시도하는 실험적이고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좀더 치열한 문제의식과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는 좋은 작품을 보여주리라 기대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