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창비시선 198
조용미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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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시는 사물과 대상의 '현상학적인' 관찰에 대해선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인의 입장에 대해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먼저 시적화자가 바라보는 사물과 대상엔 피상적으로 보이는 가시적 영역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영역까지 그 내면을 마치 스테레오 촬영하듯 섬세한 관찰이 묘사되어 있다.

먼 길들이 물에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산에서 들고 온 동백 두꺼운 잎의 맥을 짚어본다
꽃살문 저쪽은 내가 걸어들어갈 수 없는 곳, 연꽃무늬와 국화무늬의 분합문 사이를 서성이며 내가 본 것은 그 속의 동백잎보다 더 두터운 환한 어둠, 산에서 돌아온 후로 자주 새벽예불 소리를 듣는다 --<동백의 맥을 짚어본다> 부분

여기서 '동백잎'이라는 대상을 살피는 방법으로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이 동원되며, 나중엔 청각을 통해서 동백잎의 이미지를 환원시키고 있다. (새벽예불 소리→꽃살문→동백잎) 또 대상과 시적자아를 객체/주체의 관계가 아닌 주체/객체의 입장으로 바꾸어 대상의 실체에 접근하는 예는 <오동나무를 바라보는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동나무 아래 오래 서 있어/내가 오동의 풍경이 되고자 했다/누가 천산산맥을 하늘에서 보았다고 했을 때/내 몸이 천산북로로 눕는 것을 꿈꾸었듯' 그 외 '존재의 시간성'을 탐험하는 '사막의 입구인 사강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법/제부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내 한해를 물어보았던 날 저녁(<사막의 입구인 사강에서는>)'은 웅숭깊은 삶의 성찰이 여울져 흐른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시를 위해 존재하면서도 자연스레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창이 될 순 없을까. 여기서 구태의연하게 순수/참여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 나라는 유독 현대사의 질곡이 많은 나라가 아니었던가. 오늘의 시가 당대 현실 모습에 대해 동시대 사람과 같이 아파하고 그들의 상처를 싸 매어줄 수 있는 위안과 희망의 시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만약 시가 애써 이런 역할을 외면하고 시 자체에 안주하려고 들면 사랑 없이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않을까. 여기 소개하는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全琫準>은 앞서 언급한 내용에 부합되는 대표적 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면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서울로 가는 全琫準>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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