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 하늘연못 평론선 3, 정끝별 평론집
정끝별 지음 / 하늘연못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마지막 부문인 <그리움의 불멸화와 반복의 미학>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하여 첫 부문인 <시의 주술성과 시인의 운명적 선택>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대개 문학평론가의 비평문은 작가 나름대로의 비평적 안목과 기준에 의해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꼭 그것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순 없을지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에 대한 접근이 근원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끝별의 글은 작가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꼼꼼하고 다양한 시읽기'로서 '시자체가 <천 개의 혀>를 가진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서 '그에 걸맞는 <천 개 이상의 혀>를 가진 언어여야 한다는 보다 열린 비평적 태도'에 입각한 평론이다.

먼저, 제2부에 실린 글들은 작가의 주관적 생각과 판단을 가급적 자제하면서 작품의 본질과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데 충실한 비교적 꼼꼼한 시읽기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무 난해하지 않고 비교적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1부에 실린 글들은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접하고서 그 유사성과 공통점을 바탕으로 쓴 주제별 비평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독서 경험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저자는 왕성한 글쓰기 못지 않게 여러 시인의 작품을 통독하여 그 성실성이 본서에서 단연 돋보인다.

하지만 이제 이 책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평론의 생명은 작품에 대한 이해와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가에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이든 부정적인 평이든 평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2부에 실린 글 어느 곳에서도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작가의 부족한 점에 대한 충실한 비평을 찾아볼 수 없다. <열린 비평적 태도>란 모든 것을 긍정적인 면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텐데 평가할 부문에 가선 비평가가 갖는 특유의 예리한 통찰력과 판단력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예를 들어보면, 먼저 <무덤 위에서 덜그럭대는 그로테스크 시학(남진우론)>에서 작가는 '그의 시편들 역시 죽음에서 삶의 분출을 느끼게 하고 삶으로부터 죽음의 폭력성을 느끼게 한다. 죽음이 삶과 이어져 있으며, 죽음은 삶의 표징이자 무한한 삶에 대한 열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269면).'고 말하는데, 여기서 남진우에 대한 고은의 다음 글을 읽어보자.

'더욱이 여기저기서 생명만을 얘기하고 노래하고 외치는 생명지상주의의 시대에 그런 생명의 비의(秘義)조차 경건하게 껴안은 죽음에의 충실한 탐구가 있다는 것은 남진우가 한 역할 이상일 터이다. 시집 속의 어느 시 한편도 거의 실패작이나 타작이 아닌 것이 이 시집의 ‘불운’이다. 아니 이런 평범한 찬사보다 이들 시편 하나하나가 유지하고 있는 예리한 경건성과 과장되지 않는 진정성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탐미까지도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한다.(『창작과비평』, 1996년 겨울호)'

여기서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나름대로의 평가가 들어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막연한 작품에 대한 미화가 아닌 그 전반에 대한 것이다.

끝으로, 제1부 <영화에서 상상력을 베끼는 시인들을 믿느냐>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믿는다. 장정일에서 강정에 이르는 영화 마니아들, 영화에서 시적 상상력을 베끼고 있는 시인들이, 아직까지는 시인의 책무에 성실히 복무하고 있다고'. 그런데 이광호는 '키치가 문학적 양식과 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키치의 문학적 기원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적 자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근거에서 키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장정일이 시인으로서 책무에 성실히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저자의 <열린 비평적 태도>가 작품 평가의 안목을 겸비한 업그레이드된 비평으로 발전하여 20세기 평단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소중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