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식사 세계사 시인선 113
이재무 지음 / 세계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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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간지의 평론을 통해 이 시집을 알게 되었다. 이 시의 시인이 전에 이재금 시인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바대로 '위대한 식사'외에 좋은 시가 많았다. 시집을 펴니 '상수리나무'란 짧은 시가 마음에 와 닿는다.

애써 가꾼 한 해 양식을
지상으로 돌려보낸 뒤
한결 가벼워진 두 팔 들어올려
하늘 경배하는 그대들이여

주머니 속
때묻은 동전에 땀이 배인다
('상수리나무' 전문)

마지막 연이 무얼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떤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다해도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시란 산문적인 사고로 해석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가을, 시에 대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맘이 넉넉해지는 것 같았다. 농촌에서 삶의 땀이 배이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시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겨우내 마른 논이, 벌컥벌컥 수문을 따라
천천히 들어오는 물을 마실 때 논의 물
속으로 들어와 가득 차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보라, 산날맹이 너머 자주 형상을 바꾸며
저희끼리 시간을, 희희낙락 즐겨 해찰해대던
구름 몇 마리도 불현 생각난 듯 물따라
겅중겅중 들어와서는 논바닥 이곳저곳에
제 가벼운 그림자들 길게 떨어뜨리는 것을
('오월' 부분)

땡볕이 내리쬐는 오월, 게으른 들녁의 한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다. 평화롭고 자연과 합일되는 농촌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잊혀진 옛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허나, 이 시집에서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농산물 수입개방과 이농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농촌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배어있지 못하다. 고의든 타의든 간에. 자칫 농촌의 모습이 필요이상으로 미화될 수 있는 소지가 있고, 군데군데 보여지는 지나친 배경 묘사의 남발은 삶을 애환을 가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가을산'에서 마지막 두 행 '닭울음 소리 더욱 쾌쾌하고/계곡물 토실토실 살이 오르네' 과유불급이라할까, 너무 자연과 농촌에 대한 예찬으로 비쳐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잊혀져가는 우리 농촌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해준 좋은 시를 모처럼 대할 수 있어 마음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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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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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시인의 삶이 가슴 깊이 뭉클하게 와 닿는다. 시를 통해 한 시인을 만나는 것이 공식적인 대면이라면 이 책은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살다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신경림 시인 특유의 가락으로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시인들의 이야기를 구수하게 담아낸 그의 글솜씨가 돋보인다. 우선 발로 일궈 놓은 살아있는 글이 눈에 띄어 좋았다. 시인과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고 구하기 힘든 자료까지 모아 시인의 삶을 재현해 보이며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믿음과 신뢰를 사기에 충분했다.

'유치환 시인의 시가 한결같이 치열하고 준엄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더 많은 시들은 앞에 든 '그리움'처럼 따슷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워 독자들을 편하게 해주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바로 이 점이 유치환 시가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나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랏빛 갯바람이 할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우체국에서' 전문 (301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보다 새로운 면을 소개하는 글에서 '시인을 찾아서'를 읽는 묘미가 훨씬 더 느껴진다. 또한 이 책은 특별한 장(章) 구분 없이 시인별로 하나씩 읽어나갈 수 있도록 편집되어서 좋다. 게다가 적절한 사진배치가 인상적이다. 대개 사진은 크기에 비해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데, 시에서 느껴지는 여백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확 트이는 시원한 감을 주며, 말로 다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듯하여 읽는 이의 가슴에 묘한 여운을 안겨다 준다. 금상첨화 격으로 각 시인의 이름 아래 적절히 표제를 붙인 주젯말과 인용시는 그 시인에 대해 다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길라잡이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으며, 시인의 사진은 함축적으로 그의 삶과 시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흑백사진이 주는 톤은 이 책의 간결미와 여백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신경림 시인의 꼼꼼한 시 읽기에 있다. 인용시에 대해 주석을 달 듯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에 충실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간의 평에 대해 독자들이 고정관념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경계하며 시 읽는 태도를 일깨운다는 점이 바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밀물에/슬리고//썰물에/뜨는//하염없는/갯벌/살더라,/살더라//사알짝 흙에 덮혀//목이 메는 白江 下流/노을 밴 黃山메기/에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 -'黃山메기' 전문
황산메기에 소주를 먹으며 우리는 다시금 박용래의 시세계를 화제에 올린다. 향토미를 시적 발상의 원천으로 삼고 그것을 제한된 언어 속에 담는다든가 섬세한 감각으로 토속정서를 형상화한다 등이 대체로 그의 시에 대해서 내려지는 평가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이 그의 시들이다. 우선 자칫 투박할 수 있는 사물들을 꿰어 옥처럼 빛나게 하는 그의 탁발한 미적 감각이 간 과되어서는 안 되리라(104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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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집 창비시선 218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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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을 읽노라면 쓸쓸함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유독 많이 나온다. 첫 시집 '농무'에서 이번 시집 '뿔'에 이르기까지 민족시에 큰 족적을 남긴 노시인의 작품을 대하며 세월에 풍화되어 가는 한 시인의 내면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고 애잔한 정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먼저 인생을 떠도는 자의 이미지로 표출한 '떠도는 자의 노래'를 대하면 육순을 넘긴 시인 앞에 생은 벌써 관조의 대상이고 무상무념의 세계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부분

그러기에 이제 생은 더 이상 바쁘거나 치열한 경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고 '발이 부르틀 때까지' 걷고 싶은 심정이다. 시적 화자의 시선은 줄곧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누비며 '낯익은 얼굴'과 '귀에 익은 목소리'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이상향이나 낙원을 그리며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시적 화자가 걷는 그 길은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고 정겨운 길이다.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봄날' 부분

굳이 무엇을 목표로 나가는 길도 아니며, 종국엔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 자문하는 관조의 길인 셈이다. 그 오랜 방황은 때론 너무 힘들어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고 생각케 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 민중들의 애환을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해 왔던 신경림의 시에 슬픔이 드리운 건 무슨 연유일까? 신경림 시인에게 열혈남아 같은 젊은 패기와 힘찬 가락을 언제까지 요구할 순 없겠지만 어려운 이 시대의 한 고비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힘이 되고 그들 가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시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결국 인생이란 죽음 앞에 이르게 될 때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엔 현재의 삶을 부둥켜안고 사회적 모순을 헤쳐나가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뿔'을 읽으며, 나도 너무 일찍 맘이 늙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맘이 또 시에서 전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표제시 '뿔'처럼 어쩜 우린 이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나운 뿔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번도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게 되는지 모른다.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뿔' 부분

또 시인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자치구를 지나며 그곳의 인정과 삶에 모습에서 오래된 고향의 향수와 추억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다. 장백 가는 길에 압록강 너머로 주고받는 같은 민족과 대화에서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아픔을 훌쩍 뛰어넘는 아름다운 우리 정서를 발견한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도 바로 이런 인간회복과 상호신뢰가 아닐까?

전반적으로 주제가 무거워 그런지 시의 분위기가 밝게 느껴지지 않고 우울케 하는 요소도 많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성찰은 그 어느 시 못지 않게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신경림 시인의 건필을 바라며,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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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성부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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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고단을 출발 지리산을 종주하다가 오늘 아침 개인사정으로, 몸이 불편한 학생 하나를 데리고 선비샘에서 의신마을로 하산했다. 이번 산행엔 비록 무거운 배낭이었지만 '지리산'을 넣는 걸 빼놓지 않았다. 심신이 피곤해 지쳐도 시를 꺼내 볼 요량으로 챙겨두었던 것이다.오늘 아침 선비샘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전에 읽었던 대목이 생각난지라 얼른 열어보았다.

'나는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을/달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략) 어디 구천에라도 다다라서/젊은 그들의 못다한 사랑에 나를 보태고 싶었다(이런 꿈을 실현시킨 오토바이 한 대 지리산 높은 곳 선비샘 아래 산죽밭에 아름답게 쳐박혀 있었습니다)'('오토바이')

엉치 뼈가 불편한 애를 데리고 그 길을 내려온다. 그 오토바이 지금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산죽을 헤쳐 내려오는데 문득 '그들 땀내음 배인 이길로/오늘은 내가 거슬러 올라간다'('산죽')라는 대목이 생각난다.

간간이 햇볕이 내리쬐긴 했지만 구름 껴 산행날씨론 정말 그만이었다. 한 잔등이를 넘어서니 그만 길이 가물거리며 이내 사라진다. 사라진 길 사이 하얀 링겔선 하나가 보인다. 여기까지 고로쇠 물을 채취하려고 손을 뻗친 인간의 촉수다. 계곡의 집채만한 바위가 길을 가로 막는다.

'더러는 길 잘못 들어 헤메임도 한나절/상처를 입고 나서야 비로소/깨달음 얻어안고 헤쳐나온 길/돌아보면 잘 보인다'('어찌 헤메임을 두려워하랴') 목이 타고 몹시 허기가 느껴졌다. 몸이 불편한 학생은 더더욱 힘이 든지 이슬 젖은 낙엽길에 몇번이고 엉덩방알 찧는다. 아무 준비 없이 지리산에 왔다가 오늘 그 혹독한 댓가를 치르는 것 같다. 그래도 살려고 산에 왔다가 죽어서 산을 내려가는 사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맞은 편을 바라보니 저기가 대성골 쯤 되는 듯 싶었다. 혹 여기에도 이현상의 비트가 없는지 나도 모르게 산죽 바위 틈을 자꾸 바라보곤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의신마을 민박집 입구에 도달했다. 우리는 살아서 내려왔다.

하지만 왠지 맘은 자꾸자꾸 쓸쓸해졌다. 이성부 시인이 혼잡하지 않은 때를 피해 산행을 나섰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젊은날, 내가 종주했던 이 길이 이젠 낯설기조차 하여 어색하고 나도 그만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같이 내려 온 젊은 학생에게 이 길을 내어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해 본다. 어찌됐든 미래는 이제 그들의 것이다. 나와 함께 했던 이 길이 그 학생의 가슴 속에 또다른 '지리산'이 되어 먼훗날 이 산을 오를 때 산죽밭에 '동상 걸린 발가락 하나 입 앙다물어 잘라내고/생솔가지 물어뜯어 울음으로 씹었'('젊은 그들')'던 젊은 그들을 생각할 나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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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37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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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여는 순간 '크리스마스 캐롤'이 심상에 깊이 각인 된다. 최승호의 시를 연상케 하는 사물에 대한 시의 화자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분석력은 시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비추는 시의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삶의 부조리, 이 땅에 죄인을 구하러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캐롤과 '엊그제 뺑소니차에 치여 죽은/옆방 정씨의 발소리'가 대비되면서 정씨의 죽음은 크리스마스 캐롤에 묻혀 세인의 주목을 받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데,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일는지 모른다. 시의 화자는 이러한 부조리를 낳게 한 자본주의 제도와 논리를 부정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자본주의 생리에 빠져들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소식을 들으면서도 ' 두부 한 모 살 것을 걱정'하고 '세탁소에 갈 일'과 '신문 광고와 짜장면 맛을 추억'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을 타개할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쉬지 않고 길을 내'는 물고기들에게 배운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시의 화자는 가끔 '쇠뿔에 받힐까 겁이나'기도 하며 '순종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은 맘도 생긴다. '그러나 용기가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도 입증된다. '그가 실어주는 통근버스만 탈 수 있다면/친구를 배신해도 괜찮고/노선을 바꾸어도 당당하'다는 말에서 부조리한 삶을 사는 인간의 고뇌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오늘날 우린 자본주의 체계의 부작용에 대해 성토하면서도 발은 자본주의 체계에 뿌리 내리고 서 있는 것이다.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정글의 법칙을 배워나갔'던 것이고, 그리하여 '배가 고플 때는 어떤 길로 양식을 찾아가야 하는지/양식을 옮길 때는/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잃지 않'은 것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비록 정글의 법칙을 배워 행복한 것 같지만 결국 시의 화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눈물뿐이다. 이게 자본의 체계와 논리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터이다.

시의 화자는 노동귀족인 되어 노동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어디에 가시느냐고 물었다/시인은 노동대책회의가 있어서 간다면서/호텔의 커피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뿌리'). 이렇듯 맹문재의 시는 우리의 양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지니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 미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시의 화자는 자신을 서민의 자식 즉 '별들이 남긴 한 새끼'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클럽 회원증을 찢지 못하는'('利子 클럽') 자기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그게 인생의 '연극성'인데 또 어쩌랴?

맹문재의 시는 시와 시의 화자의 삶이 일치하는 매력이 있다. 첫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에서 두 번째 시집 '물고기에게 배운다'에 이르기까지 '삶의 빛'과 '시의 빛'이 일치하기에 그의 시가 더욱 빛나고 위대해 보이는 것이다. 자본주의 물살에 거슬러 그 부조리에 부딪히는 일없이 물고기처럼 이 생을 한 번 헤쳐가 보리라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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