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림 시집 창비시선 218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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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을 읽노라면 쓸쓸함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유독 많이 나온다. 첫 시집 '농무'에서 이번 시집 '뿔'에 이르기까지 민족시에 큰 족적을 남긴 노시인의 작품을 대하며 세월에 풍화되어 가는 한 시인의 내면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고 애잔한 정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먼저 인생을 떠도는 자의 이미지로 표출한 '떠도는 자의 노래'를 대하면 육순을 넘긴 시인 앞에 생은 벌써 관조의 대상이고 무상무념의 세계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부분

그러기에 이제 생은 더 이상 바쁘거나 치열한 경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고 '발이 부르틀 때까지' 걷고 싶은 심정이다. 시적 화자의 시선은 줄곧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누비며 '낯익은 얼굴'과 '귀에 익은 목소리'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이상향이나 낙원을 그리며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시적 화자가 걷는 그 길은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고 정겨운 길이다.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봄날' 부분

굳이 무엇을 목표로 나가는 길도 아니며, 종국엔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 자문하는 관조의 길인 셈이다. 그 오랜 방황은 때론 너무 힘들어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고 생각케 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 민중들의 애환을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해 왔던 신경림의 시에 슬픔이 드리운 건 무슨 연유일까? 신경림 시인에게 열혈남아 같은 젊은 패기와 힘찬 가락을 언제까지 요구할 순 없겠지만 어려운 이 시대의 한 고비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힘이 되고 그들 가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시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결국 인생이란 죽음 앞에 이르게 될 때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엔 현재의 삶을 부둥켜안고 사회적 모순을 헤쳐나가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뿔'을 읽으며, 나도 너무 일찍 맘이 늙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맘이 또 시에서 전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표제시 '뿔'처럼 어쩜 우린 이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나운 뿔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번도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게 되는지 모른다.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뿔' 부분

또 시인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자치구를 지나며 그곳의 인정과 삶에 모습에서 오래된 고향의 향수와 추억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다. 장백 가는 길에 압록강 너머로 주고받는 같은 민족과 대화에서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아픔을 훌쩍 뛰어넘는 아름다운 우리 정서를 발견한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도 바로 이런 인간회복과 상호신뢰가 아닐까?

전반적으로 주제가 무거워 그런지 시의 분위기가 밝게 느껴지지 않고 우울케 하는 요소도 많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성찰은 그 어느 시 못지 않게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신경림 시인의 건필을 바라며,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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