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성부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노고단을 출발 지리산을 종주하다가 오늘 아침 개인사정으로, 몸이 불편한 학생 하나를 데리고 선비샘에서 의신마을로 하산했다. 이번 산행엔 비록 무거운 배낭이었지만 '지리산'을 넣는 걸 빼놓지 않았다. 심신이 피곤해 지쳐도 시를 꺼내 볼 요량으로 챙겨두었던 것이다.오늘 아침 선비샘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전에 읽었던 대목이 생각난지라 얼른 열어보았다.

'나는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을/달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략) 어디 구천에라도 다다라서/젊은 그들의 못다한 사랑에 나를 보태고 싶었다(이런 꿈을 실현시킨 오토바이 한 대 지리산 높은 곳 선비샘 아래 산죽밭에 아름답게 쳐박혀 있었습니다)'('오토바이')

엉치 뼈가 불편한 애를 데리고 그 길을 내려온다. 그 오토바이 지금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산죽을 헤쳐 내려오는데 문득 '그들 땀내음 배인 이길로/오늘은 내가 거슬러 올라간다'('산죽')라는 대목이 생각난다.

간간이 햇볕이 내리쬐긴 했지만 구름 껴 산행날씨론 정말 그만이었다. 한 잔등이를 넘어서니 그만 길이 가물거리며 이내 사라진다. 사라진 길 사이 하얀 링겔선 하나가 보인다. 여기까지 고로쇠 물을 채취하려고 손을 뻗친 인간의 촉수다. 계곡의 집채만한 바위가 길을 가로 막는다.

'더러는 길 잘못 들어 헤메임도 한나절/상처를 입고 나서야 비로소/깨달음 얻어안고 헤쳐나온 길/돌아보면 잘 보인다'('어찌 헤메임을 두려워하랴') 목이 타고 몹시 허기가 느껴졌다. 몸이 불편한 학생은 더더욱 힘이 든지 이슬 젖은 낙엽길에 몇번이고 엉덩방알 찧는다. 아무 준비 없이 지리산에 왔다가 오늘 그 혹독한 댓가를 치르는 것 같다. 그래도 살려고 산에 왔다가 죽어서 산을 내려가는 사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맞은 편을 바라보니 저기가 대성골 쯤 되는 듯 싶었다. 혹 여기에도 이현상의 비트가 없는지 나도 모르게 산죽 바위 틈을 자꾸 바라보곤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의신마을 민박집 입구에 도달했다. 우리는 살아서 내려왔다.

하지만 왠지 맘은 자꾸자꾸 쓸쓸해졌다. 이성부 시인이 혼잡하지 않은 때를 피해 산행을 나섰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젊은날, 내가 종주했던 이 길이 이젠 낯설기조차 하여 어색하고 나도 그만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같이 내려 온 젊은 학생에게 이 길을 내어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해 본다. 어찌됐든 미래는 이제 그들의 것이다. 나와 함께 했던 이 길이 그 학생의 가슴 속에 또다른 '지리산'이 되어 먼훗날 이 산을 오를 때 산죽밭에 '동상 걸린 발가락 하나 입 앙다물어 잘라내고/생솔가지 물어뜯어 울음으로 씹었'('젊은 그들')'던 젊은 그들을 생각할 나이가 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