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오지 - 이문재 시집
이문재 / 문학동네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시를 읽고 난 내 맘은 파란 독 한 사발을 마신 기분이다. 시를 찾아서 시 너머를 함부로 그리워하다 내 안의 감옥에 갇힌 기분이란 게을러터지는 석류와 같다.

시집 첫머리, '노독'에 눈이 머문다. '어두워지자 길이/그만 내려서라 한다/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정말 오랜 외도였던 것 같다. 잠시 시를 떠나 세상을 그리워하며 보냈던 시간들...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얼마 전, 한 지인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 본다. '시는 애인과 같아서 질투가 많아 조금만 소홀히 하면 시에 나타난다고, 매일 읽고 매일 쓰고 하지 않으면 시에 금방 나타나니까 애인처럼 애정표현을 날마다 해야한다'던 그 말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마음의 오지'는 다시 나만의 시세계로 들어온 기분이었고, 모처럼 시의 풍경을 걷노라니 <노독>이 느껴진다. 그동안 시와 떨어져 있었던 댓가이기도 할테지만, 시읽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삶의 시위를 풀어놓고 뒤집혀 있는 내 마음, 둥그렇게 오므리고 있다가 한순간을 기다린다. 다시 시위를 팽팽히 걸고 삶을 끌어당길 완강한 그리움으로...

'불혹보다 더 큰 고문은 없었'다. '땅에 넘어진 자는/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데 나, 삶에 걸려 넘어지고서도 그 삶을 온몸에 묻히려 하지 않았다. 허황된 시간을 '지나간 불륜처럼' 가늘게 찢으리라고 다짐하면서 생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지금 이 시간의 끄트머리가 또 망연자실해진다. 그리하면 내 맘의 거리에 등명을 내 걸테고 '마음 캄캄하던 사람들도' 등명 사이로 '새파란 길'을 찾아 갈 게다. 삶에서 출항하는 모든 배는 땅끝에서 시작하는 새 길이다. 배는 언제나 길을 싣고 떠나고 '인생은 짧고 나는 진부한 얘길 한가롭게 들을 여유가 없'을 게다.

겨울 부석사에서 한 지인을 다시 떠올려본다. 탱탱한 그리움이 되돌아와 내 맘의 옅은 고임이 되고,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어느새 내 <마음의 오지>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시를 읽는 동안 '나는 내가 그'리웠을 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강은교 詩話集
강은교 / 문학동네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강은교님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비단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독자에게도 메마른 우리네 감성에 불씨를 지펴 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길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저자가 시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마음문을 여는 의미로 '詩話 앞에'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거기에 사용되는 적절한 문답법은 읽는이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 주제에 대한 자연스런 접근을 유도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예술을 일으키는 근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아마도 그것은 '전율'이 아닐까요?'(9면)

이는 시가 독자와 시인 간의 교감을 꿈꾸듯 저자와 독자와의 상호교감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데 이 책의 매력이 있다. 그런데 더욱 값진 것은 시에 대한 해석을 은유로써 설명하되 너무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적절한 시를 인용하여 예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 곳곳에 묻어나는 감성의 울림은 때때로 철학적 사변을 수반하기도 한다.

'예술은 탈주하려는 것이다. 나는 한마디 더 보탠다. 탈주하지 않으면서 탈주하려는 것, 끊임없이 기표를 살해하면서 기의를 얻으려는 것, 아, 언어, 언어, 기호......'(18면) 이렇듯 이 책은 그냥 감상적인 내용을 넘어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는 힘을 길러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카루스나 피그말리온 같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이나 장자의 우화를 곁들여 설명함으로써 고전에 대한 지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고전을 통해 현재를 생각케하는 '온고지신' 정신을 북돋아 주고 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네 감성을 자연스럽게 울리며 작은 것을 통해, 생활 주변 이야기를 통해, 사유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질문에 접근해가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한 글쓰기가 단연 돋보이는 책이었다.

다만, 시에서도 '시적긴장감'이 중요하듯이 이책에서 글쓰기의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게 흠이다. 다소 만연체 같은 내용이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에도는 감을 줄 때가 있다.
'사유는 존재의 힘이다. 가능성이다. 삶의 해석이다. 그 속에서 그대는 진정한, 그러나 숨어 있는 메세지를 가져올 수 있다.'(91면)\ 하지만 시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건 어쩜 필연적인 상황일런지도 모른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나름대로 선보였지만 만족할 만한 답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강은교님이 '詩話'라는 통로를 통해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독자와 교감을 시도해보려고 했다는 것은 문학담론 측면에서 실로 값진 결과라고 보여진다. 이제 막 시를 쓰려고 맘 먹은 사람들이나 시를 쓰다가 잠시 시가 버거워 보이는 이에게, 그리고 문학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이용한 글, 심병우 사진 / 실천문학사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들어가는 글'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오지마을' 체험은 한마디로 시간여행이다. 지층연대가 지금으로부터 훨씬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오를수록 '오지마을'의 조건에는 가까워진다. 그런데 또 이 시간개념은 공간적인 제약에서 비롯된다. 가령 지리적인 격리가 심할수록 시간적인 격리도 심해진다. 공간적인 단절이 시간적인 단절을 가져온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오지마을에 대한 소개가 행여 무분별한 여행으로 오지마을이 더욱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이 책 곳곳에서 말하고 있듯이 현지 주민들이 갖는 가장 큰 불만 중의 하나가 여행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빈병, 깡통 등이다. 차후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생태관광'을 실시할 걸 제안해본다. '생태관광(ecotour)'이란 친환경적 관광으로 자연환경 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의 삶과 문화까지 아끼고 훼손하지 않는 여행을 뜻한다.

강원도 동강변의 오지마을 등에는 댐건설로 인한(지금은 백지화 되었지만) 주민들의 애환이 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린 피상적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오지마을을 보호해야된다고 주장하지만, 현지 주민 입장에선 수십 년간 가난에 찌들리고 불편한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문명 세계에 살면서 그들에게 우리를 위해 비문명 세상에서 더욱 더 오래도록 살아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세상은 오지마을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멀리 지나와 버렸다. 인터넷과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이제 오지마을 얘기는 먼 옛날 이야길런지 모른다. 오지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촌노들이다. 젊은 자식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고 이제 촌노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빈집으로 남아 폐허가 되어 버릴지 모른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오지마을을 훼손하며 난개발하는 것도 경계해야겠지만 오지마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를 보존하는 일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나고 자란 고향을 기억하고 공동체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오지가 사라지는 게 정작 아쉬울 뿐이다.

이 책 곳곳에 실려 있는 인물, 산수 사진은 책 내용의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적절하고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귀한 것들이다. 다리 품을 팔아 우리 문화의 흔적을 찾고자 했던 작가와 사진기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요즘 같이 이런 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어떤 사명감과 책임감에 사로잡혀 이렇게 꼼꼼히 책으로 엮은 정성은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된다. 고향을 잃은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밭 창비시선 210
최정례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는 은유나 이미지를 통해 우리 삶의 안과 밖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소재도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것들을 적절한 시어로서 배열했다고 해서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시는 사물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산문과도 다른 양식이기 때문이다. 『붉은 밭』을 읽노라면 시적화자의 자유분망한 상상력의 진폭이 느껴지고, 현실을 설명하는 기존의 틀을 부수고 다른 시각에서 또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가령 '빌딩 사이를 건너/ 스카이라인을 그으며/ 휘어 빠져나간다/ 탐스런 금빛 꼬리 흘린다('여우의 길')' 이런 이미지는 동화적 상상력이 물신 풍기며 시적 화자가 독자에게 말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시를 대할 때 시의 메시지가 적어도 산문의 전달방식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믿고 있거나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인과관계의 틀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안도현의 시 가운데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그리운 여우')'처럼 표현했다면 독자들은 훨씬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은유나 상징을 어느 정도 사용하여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간극을 얼마만큼 두느냐, 라는 것이다. 시의 에스프리에 충실하여 산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은유나 상징을 통한 이미지로써 어떤 시적 형상화를 이룬다면 그것은 (시정신에) '끌려가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뚱뚱한 투명한 덩어리네/ 벙어리네/ 그가 집으로 돌아왔네/ 아무도 그가 돌아온 줄 모르네('투명한 덩어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 시도 시로서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느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일상적 언어나 기존 관념을 벗어나는 것이 시라고 할지라도, 그 뿌리는 일상적 현실에 두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시는 시적 형상화와 유려한 이미지의 배열 그것이 전부일까? 그렇진 않다. 우리 삶의 안밖을 언어로서 표현하기에 당대의 삶과 사회 문제를 전혀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부류의 시를 (시정신을) '끌고 가는 시'라고 말하자. 예를 들어 백무산의 시 가운데 '사회면 기사를 보다가 그가 노동자일 때/ 흉악한 범죄자가 무슨 기업 무슨 공업 노동자일 때/ 내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부당한 인간')' 처럼 당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대중(독자)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의지(우린 그것을 시의 계몽성 내지는 교훈성이라고 하겠다)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시가 있다. 하지만 여기엔 시의 에스프리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산문적인 어투가 강하게 배어 있다.

따라서 시를 판단하게 될 때 양 극단적인 시:'끌고 가는 시', '끌려가는 시'는 좋은 시라고 말하기 힘들다. 『붉은 밭』에 수록된 3부의 시들은 일상현실에 근거한 시들이 많지만(엄밀히 말해 리얼리즘 계열의 시도 아니며), 나머지 시들은 거의가 '끌려가는 시'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의 에스프리에 충실히 따르려는 작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시가 '가장 밀도 높은 언어들을 구사'(이남호)한다 할지라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삶의 애환을 노래함으로써 보다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사년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시가 고통받고 굶주린 자들에게 어떤 무게를 줄 수 있는가, 라는 싸르트르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혼불』이 처음 나오던 해, 한 일간지에 지금은 작고하신 최명희 선생의 글이 실린 적이 있는데 한땀한땀 수놓듯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년필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7년만에 결실을 맺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우리 전통 관념과 문화의 면모를 형상화하고 있는 문화 전승의 전범(典範)적 기능을 하고 있다. 효원이 청사 초롱을 밝히는 대목에서 '신행'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행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혼불』서사의 본질은 사건의 추이(推移)를 전하는 데 있지 않고,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내는 데 있다'고 문학평론가 장일구가 말했듯이 언어의 조탁에 의한 묘사의 탁월함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특히 배경의 묘사에서 돋보이는 '언어의 조탁이 시의 수준을 이미 능가하고 있는데, 그 조탁한 언어를 소설 서사에 이질감 없이 운용하는 것이 『혼불』의 수월성이다.' 바로『혼불』에는 상징어, 비유어, 색채어, 의성어, 의태어 등이 적절히 구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혼불』은 우리 풍속사의 전범과 계승이라는 일차적인 복선만 깔고 있지는 않다. 그 가운데 춘복이의 '변동천하’이야기가 끼어들게 된다. 이 이야기는 『혼불』의 주요 사건 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인데, 천민인 춘복이가 양반댁 작은아씨인 강실이를 차지하려는 야망과 음모가 전개되는 부분이다.

『혼불』은 우리네 삶에 밀착해 있는 이야기를 구현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는 전통의 관념과 문화의 면모를 치밀하면서도 폭넓게 형상화하고 있다. 문화 전승의 전범(典範)이 되는 담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기 구현된 전통 문화의 면모는 정확하고 다채롭다. 그리고 전통의 문제를 역사나 현실의 문제와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의식 또한 『혼불』의 빛나는 성과 중 하나이다.

9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은 전통문화에 대한 계승이나 역사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신변잡기나 일상생활의 권태 혹은 내면적 세계에 집착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었다. 이런 경향을 고려해볼 때, 『혼불』은 전통과 역사에 관련된 주제 의식을 전제하고서도 수준 있는 미적 통찰로써 구현되어 있어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비록 작가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지만 우리 시대에 『혼불』이 삶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또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뿌듯하다. 소설 『혼불』은 작가의 고향 전주와 남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전라도 토속어의 판소리 흥이며 기운을‘이야기’에 실어 절묘하게 연행(連行)해 보임으로써 한국 문화와 정신을 예술적 혼으로 탁월하게 승화시키고 있다. 『혼불』은 소설의 울타리, 그 이상을 뛰어넘어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기록되리라 확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