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밭 창비시선 210
최정례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는 은유나 이미지를 통해 우리 삶의 안과 밖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소재도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것들을 적절한 시어로서 배열했다고 해서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시는 사물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산문과도 다른 양식이기 때문이다. 『붉은 밭』을 읽노라면 시적화자의 자유분망한 상상력의 진폭이 느껴지고, 현실을 설명하는 기존의 틀을 부수고 다른 시각에서 또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가령 '빌딩 사이를 건너/ 스카이라인을 그으며/ 휘어 빠져나간다/ 탐스런 금빛 꼬리 흘린다('여우의 길')' 이런 이미지는 동화적 상상력이 물신 풍기며 시적 화자가 독자에게 말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시를 대할 때 시의 메시지가 적어도 산문의 전달방식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믿고 있거나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인과관계의 틀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안도현의 시 가운데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그리운 여우')'처럼 표현했다면 독자들은 훨씬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은유나 상징을 어느 정도 사용하여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간극을 얼마만큼 두느냐, 라는 것이다. 시의 에스프리에 충실하여 산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은유나 상징을 통한 이미지로써 어떤 시적 형상화를 이룬다면 그것은 (시정신에) '끌려가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뚱뚱한 투명한 덩어리네/ 벙어리네/ 그가 집으로 돌아왔네/ 아무도 그가 돌아온 줄 모르네('투명한 덩어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 시도 시로서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느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일상적 언어나 기존 관념을 벗어나는 것이 시라고 할지라도, 그 뿌리는 일상적 현실에 두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시는 시적 형상화와 유려한 이미지의 배열 그것이 전부일까? 그렇진 않다. 우리 삶의 안밖을 언어로서 표현하기에 당대의 삶과 사회 문제를 전혀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부류의 시를 (시정신을) '끌고 가는 시'라고 말하자. 예를 들어 백무산의 시 가운데 '사회면 기사를 보다가 그가 노동자일 때/ 흉악한 범죄자가 무슨 기업 무슨 공업 노동자일 때/ 내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부당한 인간')' 처럼 당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대중(독자)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의지(우린 그것을 시의 계몽성 내지는 교훈성이라고 하겠다)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시가 있다. 하지만 여기엔 시의 에스프리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산문적인 어투가 강하게 배어 있다.

따라서 시를 판단하게 될 때 양 극단적인 시:'끌고 가는 시', '끌려가는 시'는 좋은 시라고 말하기 힘들다. 『붉은 밭』에 수록된 3부의 시들은 일상현실에 근거한 시들이 많지만(엄밀히 말해 리얼리즘 계열의 시도 아니며), 나머지 시들은 거의가 '끌려가는 시'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의 에스프리에 충실히 따르려는 작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시가 '가장 밀도 높은 언어들을 구사'(이남호)한다 할지라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삶의 애환을 노래함으로써 보다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사년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시가 고통받고 굶주린 자들에게 어떤 무게를 줄 수 있는가, 라는 싸르트르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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