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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평점 :
이 책은 얼마 전 친애하는 언니에게 들었던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내가 가진 세상의 이야기는 오롯이 나만이 써낼 수 있다고, 아무 이야기도 쓰지 않고, 내가 죽고 나면 아무도 내 세상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없다고.’
가진 이야기를 묻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가진 이야기를 꺼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대체로 수치스럽고, 부정하고 싶은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그렇게 괴롭고 아픈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하는 독특한 사람은,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 에르노를 만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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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1958년 그가 열여덟일 때, 여름에 방학 캠프 지도 강사로 잠시 집을 떠난다. 백지상태의 사회적•성적 경험을 뒤로하고, 억압적인 집안 환경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겠다는 자유로움에 설레는 마음을 품고서.
화자는 거기서 또래 남자인 지도 강사 H를 만난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와 성적 경험을 하게 되고, 이후 동료들에게는 추잡한 대우를 받게 되며,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까지 퍼져 버린다.
하지만 그런데도 화자는 H를 사랑한다고 믿어 버린다. 몸을 나눴으니까.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고, 단순히 엔조이를 위해 접근했으리라는 개념 조차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약혼자까지 견제하며 자기 몸과 마음을 학대한다.
화자에게 남은 것은 무월경, 섭식 장애, 도벽. 사랑을 믿었던 여자아이는 혼란했고, 자신의 삶을 이렇게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낸 남자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 남자는 철저히 자기 삶에서 여자아이의 틈을 만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 남자는 한 여자아이의 삶을 자신이 그토록 뒤흔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지능과 개념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자가 시간이 흐르고 찾아본 그 남자, H는 큰 덩치는 그대로지만 뱃살 뒤룩한 체구를 지닌 늙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한 여자아이의 인생을 조각낸 그 여름으로부터 2년 뒤 결혼식을 올린 H는 많은 자녀, 손주, 증손주를 지닌 남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화자는 그런 H를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존재 속에,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심지어 행동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 P.131
내가 이토록 분노를 느끼는 건, 내 엷여덟의 여름에 스쳐갔던 수많은 H들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단지 사랑을 원했던 한 여자아이를, 하룻밤 한순간의 오락거리로 전락하게 한 추잡한 존재들.
그들은 나를 기억이나 할까? 나는 지금도. 아직까지도 내 삶 속 깊은 마디마디에 그들이 남기고 간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불쑥 예고없이 상처입고 무너지곤 하는데.
이 기억이 잊힐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잊혀도, 기억은 잊히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억으로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살아져 왔으니까. 기억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나도 화자처럼 몇십 년이 걸린대도, 내가 겪은 열여덟 여름의 세상을 언젠가는 나의 바깥 세상으로 꺼내 놓아야 한다는 걸 안다. 그래야 내가 나로서, 오롯이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사실 몇 번이고 글을 썼다. 열여덟 여름의 기억을, 그때 내가 느꼈던 것들을. 수기든 소설이든 어떤 형태로든 써내려고 했다.
하지만 화자처럼 객관적일 수는 없었다. 한 줄을 쓰는 것도 고통스러워서, 문장 마디마디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차라리 다 묻어두고 뭉개버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자꾸만 마음 언저리에서는 내가 겪었던 것을 써야만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야 네가 산다고, 되려 글을 쓰는 게 죽을 것만 같은데 참 아이러니한 소리였다.
하지만 언젠간 마주할 수 있겠지. 서두르지 않되 마주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날 내가 뒤로하고 도망쳤던 엷여덟의 여자아이를 단단히 품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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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바탕은 이 책이다. 지나간 아픔을 객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사랑, 진로, 통틀어 인생.
영원토록 묻어두지 말고 언젠가 써내자. 쓰고, 생각하고, 딛고,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