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 펼처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하지만 모든 이들, 하이데거, 마야코프스키, 아라공, 에즈라 파운드, 고리키, 고트프리트 벤, 생존 메르스, 지오노 등, 모든 이들이 안개 속을 걸어갔으며,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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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라라는 대가족에서 예술가는 결국 다수의 끈에 의해 다수의 방식으로 구속된다. 니체가 독일 특성을 큰 소리로 혹평하고, 스탕달이 자신은 조국보다 이탈리아를 더 좋아하노라 선언해도, 어떤 독일인, 어떤 프랑스인도 이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어떤 그리스인이나 체코인이 그런 소리를 떠벌린다면 그의 가족은 그를 혐오스러운 배신자로 여겨 극렬히 배척할 것이다.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뒤에 묻힌 유럽의 작은 나라들(그들의 생활, 그들의 역사, 그들의 문화)은 바깥 세계에 알려지는 일이 거의 없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들의 예술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이 예술이 불구인 것은 모든 사람들(비평, 사료 편찬, 이방인들은 물론 동포들 역시)이 그것을 국가 가족이라는 커다란 사진 위에 붙이고는 바깥으로 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까닭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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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실을 탐구하고 논하고 분석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정신에, 우리 기억에 나타나는 대로 분석한다. 우리는 현실을 과거 시제로만 안다. 우리는 현실을 현재 순간,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있는 순간 그대로 알지 못한다. 한데 현재 순간은 그 추억과 같지 않다. 추억은 망각의 부정이 아니다. 추억은 망각의 한 형태다.

우리는 꼬박꼬박 신문을 읽고 모든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기록들을 다시 읽다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단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도 떠올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욱 고약한 것은 상상력이 우리 기억을 도와 그 잊힌 것을 재구성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라는 것, 검토할 현상으로서, 구조로서의 현재의 구체 내용은 우리에게 미지의 혹성과 같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우리 기억에 붙잡아 둘 줄도, 상상력으로 그것을 재구성할 줄도 모르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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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나는 "역사의 종말" 이란 말에 불안이나 불쾌감을느낀 적이 없다. "그것을 잊는다는 것, 그 무용한 일들을 하게하려고 짧은 우리 삶의 수액을 다 소진한 그것, 역사를 잊는다는 건 얼마나 근사할 것인가!" (<삶은 다른 곳에>) 역사가 끝날거라면 (철학자들이 즐겨 말하는 그 종말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어렵지만) 어서 끝장나기를! 하지만 "역사의 종말"이라는 이 똑같은 문구를 예술에 적용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종말,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의 소설 생산 대부분이 소설사의 장 바깥에 있는 소설들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소설화된 고백, 소설화된 탐방기, 소설화된 보복,
소설화된 자서전, 소설화된 폭로, 소설화된 규탄, 소설화된 정치 강론, 소설화된 남편의 고뇌, 소설화된 아버지의 고뇌, 소설화된 어머니의 고뇌, 소설화된 능욕, 소설화된 출산 등 시대의 종말까지 끝없이 이어질 소설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말하지 않고, 어떤 미학적 야망도 없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이해나 소설의 형태에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 서로 비슷한, 아침에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고 저녁예 완벽하게 던져버릴 수 있는 소설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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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말이다. 이 맹렬한 판단 성향은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없이 고약한 어리석음이요 다른 무엇보다 해로운 악이다. 소설가가 도덕적 판단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반대해서가 아니다. 다만 소설가는 그것을 소설 저 너머로 보내 버린다. 거기에서 여러분이 파뉘르주를 비겁하다고 비난하든, 에마 보바리를 비난하든,
라스티냐크를 비난하는 그건 여러분의 일이다. 그것까지야소설가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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