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정확히 그가 세계를 미학화하고 기억하는 한에서, 오직 그렇게 하는 한에서만 세계를 구원한다." 신은 이 모든 기억을 하나의 통합적인 개념적 조화(1929/1978,346 [655])로 구체화하면서도 세계의 모든 세세한 세부까지 다 기억한다. 그러나 만약 신이 모든 지나간 존재의 모든 경험을 기억한다면, 그는 그러한 경험들과 기억들 자체를 생산하거나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우발적이든 예측 불가능하든 우리에게 행하도록 남겨진 것들이다. 스피노자의 책이 "영원한 필연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기는 "정신적 만족으로 끝나는 곳에서, 화이트헤드의 책은 오히려 새로움과 모험을 위한 우리의 끈질긴 갈망"(351[664])을 정당화하고 그것 속으로 우리를 되던지면서 끝난다. 그것은 윤리학보다는 미학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당연하게 진리라고 부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지식 연대를 결정하는 상징들의 문맥 밖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기호란 서로 내포되거나 구별되는 방식일 뿐이기 때문에 의미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기호의 구조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호한 상대주의라는 씁쓸한 위로를 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같은 진행 과정 하나하나가 바로 하나의 진리이며, 미래의 보다 포괄적인 진리 속에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라는 것은, 사유에 적합한 단어를 찾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문장이 옮기려고 애쓰는 일종의 관념적인 텍스트로서 존재하고 있다. 작가마저도 자신의 작품과 비교할 만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신이 사용한 것보다 앞서는 어떤 언어도 알지 못한다.

만약 언어가 원본 텍스트의 번역이나 암호화된 이본異本이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우리는 완벽한 표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될 것이고, 결국 모든 언어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소위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어는 사유를 복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해체되었다가 사유에 의해 다시 결합될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치 발자국이 몸의 움직임과 노력을 반영하듯, 언어는 사유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기성 언어의 경험적 활용과 창조적 사용은 구별해야 한다. 경험적인 활용은 창조적 사용의 결과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 들뢰즈 경성대문화총서 23
토드 메이 지음, 이윤성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도, 무엇이나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맞는 조건이라면, 무엇이나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무엇이든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렇게 많은 것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세계의 가능성들은 우리들 너머에 있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 들뢰즈 경성대문화총서 23
토드 메이 지음, 이윤성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과 필연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 모노가 바로 그 점을 발견한다. 프리고진도 역시 그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이다. 주사위가 던져지고, 그 주사위가 숫자를 드러내며 떨어진다. 과학의 영역에서, 모노와 프리고진은 더 나은 주사위 던지기 선수들이다. 그들은 그 게임에서 존재는 없고, 오직 되기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또는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유일한 존재는 되기의 존재이다.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하여 진실한 종합은 순간적으로만 타당하다. 그러하듯 행복도 섬광처럼 찾아들 뿐이다. - P14

비평은, 그것이 지배적 견해와 집단적 권력을 거스르지 못한다면, 살아남기 어렵다. 그러나 살아남는다고 해도 비평은, 또 문화의 언어는 자연의 부서진 조각일 뿐이다. 진리는 진리 밖의 어떤것과 만나지 않고 진실하기 어렵다. 참된 것은 잔해 속에 있고, 문화사의 업적이라는 부서진 것들의 잔해, 즉 토르소를 닮아 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술의 작업에서, 또 학문의 진실탐구에서 우울은 불가피하다. 삶의 피로taedium vitae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상실의 감정으로 살아가고, 이 상실의 슬픔 속에서 잠시 행복할 수있다. 영원한 것은 상실의 아련한 목록뿐. - P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