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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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어른이 되면 보이는 게 달라지니까.(p.56)

한 번에 하나씩 해야 해.(p.270)

이 흉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당이 되어야지(p.340)



마냥 우둔한 것 같지만 열두 살 ‘입분’은 제법 기민한 눈치와 뛰어난 관찰력을 지녔다.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전전하는 삶에서 스스로 체득한 능력일 것이다. 불야성으로 빛나는 경성의 복판에서 가진 것 없는 조선인 소녀가 살아남기 위한 나날이 펼쳐진다.

독신자 아파트, 입분의 눈에 마치 성처럼 보이는 ‘명성아파트’는 산 중턱 절벽 바로 아래 위치해 있다. 어딘가 기묘한 느낌을 지닌 이곳의 입주민들은 사연도 직업도 나이대도 제각각 나름으로 다양하다. 입분의 마님 역시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라이스카레가 먹고 싶다고 대답하는(p.59),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다.

소설은 독자를 줄곧 이 기이하고 불신 가득한 명성아파트에 붙들어 둔다. 아이스고히와 백화점, 조선 땅의 금맥, 순사,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일제강점기 생활상을 다방면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독립을 주창하는 정의와 친일로 복종하는 배덕의 대립을 보여주는 대신에 인간의 욕망과 양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람은 완전히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p.189)기에 모두가 다 살인사건의 용의자처럼 보이고, 살인 현장에 붉게 쓰여진 ”대한독립 네 글자“는 소리내어 말하기 무섭다. 멋진 성채같던 아파트는 이제 범인이 숨어있는 마굴같기만 하다.

사건을 뒤쫓는 입분의 시선은 서투르고 투박하지만 “한 번에 하나씩” 허점을 분석하고 용의자를 소거해나간다. 범인을 잡지 않고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화(p.269), 그 분노를 들여다보는 입분의 모습, 때묻지 않은 마음을 자꾸만 응원하게 된다.

1939년의 혹한 여름은 입분을 훌쩍 자라게 만들었다. 정교하게 그려낸 시대상과 촘촘한 트릭이 맞물려서 더 흥미롭다. “이 흉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당이 되어야”(p.340)한다는 마님은 “신성한 네 글자를 모욕“(p.341)하는 것만큼은 단죄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마님과 한편이 되고싶은 입분은 인간사 모든 일이 그저 선과 악으로만 나눌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입분보다도 관찰력 없는 나는 그저 책장을 급히 넘기며 따라가기 급급했다. 뒤로 갈수록 활자를 빨리 읽어내고 싶은 욕망과 아껴읽고 싶은 마음이 서로 겨뤘다.

자신의 속도로 불의에 맞서는 입분과 무덤덤한 마님의 남은 날들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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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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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서평단

자전적 소설이어서 더 생생하다. 주인공 요아힘, 요세가 일곱 살이던 시절에서 시작한 시간의 흐름은 청소년기와 성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정신병원장 아버지와 어머니, 치고받고 우당탕탕 두 형과 육아레벨 만렙 막내 요세, 그리고 강아지 아이카까지 만만치 않은 집안의 일상이 담겼다.

각 에피소드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 한 토막이다. 요아힘은 “허구로 진실을 찾아낸 순간”(p.28)들을 모두 꺼내어 보인다. 그 속에는 가족들을 향한 사랑도 있고, 그들 개개인이 가진 모순적인 삶도 있고, 우정, 상실과 분노, 끊임없이 추구하던 “명료함”과 같은 것들이 모두 들어있다. 그는 “허구는 곧 기억이”(p.29)라고 단언한다.

정신병원장 아버지를 둔 까닭에 요아힘의 집은 병동이 둘러싸고 있다. 천오백명의 환자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글자를 익히고, 삶을 살아간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사회의 기준은 요아힘을 설득하지 못한다. 오히려 병원 밖 정상인들의 사회가 그를 분노케하고, 몰이해하며, 상처를 준다.

요아힘의 시선을 통해 되짚어보는 과거의 편린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투명한 진실성 덕분에 애틋하고 먹먹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범인의 눈으로 이해하기에 그의 정신세계는 자유롭고, 그 경계없음은 정상과 비정상도 달리 보지 않아 “광기”마저도 가장 순수한 삶의 발로로 느낀다. 이제, 과거 당시 주변의 몰이해로 상처받고 분노하던 시절을 다시 대면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요아힘은 “기억의 꾸러미를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p.479)이라고 말한다.

늘 진실을 말하지만 그 진실은 언제나 의심받고,여자친구와의 스킨쉽도 강박적인 숫자세기로 어려움을 겪고, 일생 바람기로 어머니를 외롭게 했던 아버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함께 해준 어머니의 선택까지. 세상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요아힘은 그가 겪은 과거의 면면을 보여주며 숱하게 말한다.

삶을 꿰뚫어보는 시선이 담담하게 이어진다. 또, 충분히 “한 세계의 상실을 애도”(p.481)한다.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뿐이”(p.483)라고 받아들인다. 자기 세계에 몰두하는 것의 아름다움, 그 선명함, 삶과 죽음, 모순, 인생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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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하루 - 조금씩 선명해지는 나의 시간
이지(izi)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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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서평단

조금씩 선명해지는 나의 시간이라는 부제에 꼭 맞는 그림에세이다.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단단해지는 ‘나’를 보여준다. 12만 팔로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공감을 받은 인스타툰을, 사철제본으로 엮어 손으로 넘기는 물성까지 갖추었다.

작가는 자전적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다. 만성 우울증에서 시작된 인간 관계의 고민, 방황, 진로 등을 모두 풀어두고, 그것을 회복해 온 여정도 드러낸다.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800여장의 종이로 빼곡하게 채워두었다.

각 잡고 심각하게 들여다보면 버거울 이야기들은, 귀여운 그림체와 담백한 글이 더해져서 고개 끄덕이며 도리어 위로받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우울은 익숙한 감정이고 ‘관계’는 늘 사유와 번민이 이어지게 하는 화두다. 그래서 마치 내 이야기, 내 속마음과 닮은 장면들에 오래 머물렀다.

총 4챕터로 나누어진 흑백의 하루는 소제목만 봐도 마음에 다정이 스민다. “너는 그런 사람이야”(챕터1)라고 자기 본연을 드러내고 인정하게 하며, “잠시 길을 잃더라도”(챕터2) 다시 갈피를 잡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낼 뿐 낭떠러지는 없을 거라 단언한다. (p.316) “나를 이루는 일부“(챕터3)에서는 일상의 호오를 보여주고, “문 뒤의 너에게”(챕터4) 전하는 사랑과 신뢰는 제법 단단하다.

어떻게든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그림 속에는 우울과 극복의 시간들을 있는 힘껏 살아온 이야기가 담담히 이어진다. 작가의 여정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싶어진다. 그가 일상 속에 보여주는 다정한 시선과 기록형 인간의 삶과 자신의 결이 선명한 모습(p.177)이 인상깊다.

어떤 이유로든 방황하고 있다면, 혹은 20대를 앞두거나 20대이거나 20대를 지나왔다면 어느 에피소드 하나라도 꼭 마음과 기억에 맺힐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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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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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서평단

치유의 과학은 파괴의 과학 앞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p.18)

자연이나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출발을 제공함으로써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언제나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p.326)



1차 세계 대전의 양상과 성형 수술의 발전사를 함께 되짚어 볼 수 있는 책. 논픽션이어서 생존자들의 일기와 사진, 당시 기사 등 자료가 생생함을 더한다.

미용 목적의 성형 수술에 익숙한 현시대와는 사뭇 다른 초기 성형 수술의 역사에 관해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새로운 관점으로 성형 수술의 의미와 얼굴 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외과의 해럴드 길리스가 얼굴 부상병들에게 보여주는 신의와 위로가 감동 서사를 완성한다.



전쟁은 세상 무엇에게나 참혹한 흔적을 남긴다. 삶의 터전은 물론이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몸과 마음에도 그것이 긁고 간 상흔이 선명했다.

골프를 치며 유유자적하고, 발레리나의 엉덩이에 박힌 가위를 빼낸 것이 일생일대의 자랑거리던(p.45)외과의 해럴드 길리스도 이 전쟁의 복판에 서 있었다. 그가 적십자사를 통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던 1915년은 서부 전선이 들끓고 있었다. 시신과 부상병들의 상황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고, 열악한 환경과 초기 단계에 머문 성형 수술로 인해서 얼굴 부상병들의 예후는 특히 더 심각했다.

얼굴은 정체성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심지어 “얼굴 손상이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 잘못된 믿음”(p.25)이 널리 퍼져있던 시절이었다.

길리스는 의학계는 물론이고 예술계의 협업을 통해서 성형 수술이 외과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끔 애쓴다. “협업의 시대”를 열고 “치의학과 성형외과 의료진이 한 팀이 되어 힘을 모았다.”(p.75) 수술과정이 체계적인 기록이 되게끔 세밀한 초상화를 그리게 했고, 의학적 지식과 예술적 창의성, 미학적 관점을 더해서 부상병들의 얼굴과 자존감을 함께 재건하려 애썼다.

부상병들의 부상 정도와 사연, 삶의 방향도 각양각색이다.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자, 스스로 파혼하고 은둔한 자, 재건 수술 후 길리스의 개인비서가 된 자, 얼굴이 거의 다 날아간 채 엎드려 있다 기사회생으로 구조된 자. 이 부상병들이 우정과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는 터를 만들기 위해서 의술과 상관없는 신부는 마취의를 대신했고, 갓 학업을 마친 풋내기 간호사, 부상자를 싣고 온 구급차 운전자도 피웅덩이를 쓸고 잘린 팔이나 다리를 들어야 했다.(p.81) 길리스는 이 아무것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영역에 뛰어들어서 놀랄만한 성과를 주도해낸다. 그 이면에 아픔도 있었다. 수술이 매번 성공적일 수는 없었고, 기법들을 표준화하기까지 검증이 필요했다.

그 시간들을 거쳐서 마침내 길리스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다친 젊은 병사”에게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고, 앞서 수술받은 친구들 못지않게 멋진 얼굴을 갖게 될 거”(p.302)라 자신한다.

냉혹한 현장에서 끝까지 인간의 존엄과 삶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활자로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또 전쟁의 야만과 참상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선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고 서로 연대해 공포를 딛고 성형 수술과 얼굴 재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이는 역사를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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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 지하 대피자들
전예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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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서평단

“잘 들어요, 혹시 뭐가 잘 안 되면,” 주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적강산 자연휴양림 고라니 매점으로 오면 돼요.” (p.14)

“나는 우리가 서로한테 그런 존재로 남으면 좋겠어요. 내가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기억으로.”(p.192)



다만 쉬고 싶을 뿐인데 세상은 쉼에도 이유를 대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직 활동도 안 하고 놀고먹는“ ”잉여 인간”(p233)이라 서슴없이 비난한다. 사회가 원하는 틀과 질서에서 조금만 엇나가도 가차없이 날세우며 달려들면서 선의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도와주려고 그랬다는 남루한 변명으로는 이기적인 민낯을 채 가릴 수도 없다.

『매점 지하 대피자들』에는 소위 “인생 망한 사람”(p.209)들이 그런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처하며 시작된다. 그러나 휴양림에 위치한 ‘고라니 매점’의 지하에서는 기대했던 고립 대신 연대의 장이 펼쳐진다.

주인공 선우는 사회생활에 진저리치다 적강산 고라니 매점을 찾게 된다. 어메니티로 헤드렌턴과 야전삽을 내어주는 이곳은 매점 아래로 직접 굴을 파고 나름의 질서에 맞춰 투숙하는 ‘호텔’이다.

굴을 파는 행위는 생존이자 사회에서의 분투와도 닮아있다. 온몸을 다 우그러뜨리고 기어서 길을 내는 동안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흙먼지, 막다른 길, 예기치 못한 상황들, 진위를 파악하기 힘든 사건, 타인을 향한 경계와 같은 것들과 마주친다.

어느 순간, 지하 대피자들은 느슨한 연결로 서로를 간신히 지탱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사이다. 완벽한 연대와 끈끈한 우정, 곡진한 보살핌과 같은 것들로부터 도리어 자유롭다. 공동체라는 결속 안에서도 뚜렷한 ‘나’를 잃지는 않는다. 섣불리 구원을 말하지도, 희망을 주워섬지도 않아 오히려 진솔하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모든 것들이 휩쓸려 가는 장면은 속엣말을 다 쏟아내는 통곡같다. 선우를 비롯해 각자의 이유와 사연으로 은둔을 자처하던 이들을 지상으로, 지붕 위로 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연락이라도 하고”(p.256) 지내자 말을 건네면서 미래를 기약한다. “이제 어떻게들 살 거”(p.256)냐는 물음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자라 있다.

작가의 문장에는 요란하지 않은 위로가 담겼다. 나와 어딘가 닮은 점을 찾아가며 읽었기에 굴로 숨었던 대피자들의 다음 일상이 궁금해진다.
#전예진 #매점지하대피자들 #한국문학 #젊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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