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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밀림은 자유고 도심은 공포다. 호랑이에게는 그렇다.
도심은 자유고 밀림은 공포다. 인간에게는 그렇다.
<나, 황진이>, <불멸의 이순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김탁환님의 새로운 장편소설 <밀림무정>이다.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15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그의 발품은 저멀리 러시아까지 도달했고, 섬세한 호랑의의 표현력에 감탄하기도 아까운 시간을 내달리며 책을 읽었다.
조선의 마지막 야생 호랑이, 백호 '흰머리'와의 숙명적 대결을 벌이는 조선 최고의 포수 '산'과 그런 흰머리를 보호하려는 여인, '주홍'. 이들의 쫓고 쫓기는 호흡에 독자인 나는 헐떡이며, 어느새 무릎까지 쌓인 눈밭을 뒤따라가고 있다. 흰머리와 산.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을 잃게 되는 운명을 지니고 7년동안 오직 흰머리는 산을, 산은 흰머리만을 응시하며 대응한다. 흰머리를 유인하고 있는 산과, 산을 유인하는 흰머리. 도데체 누가 누구를 쫓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예기치 않은 주홍의 등장.
흰머리와의 대결을 앞두고 뛰어든 산 앞에, 그의 동생 외팔이 수와 함께 나타난 해수격멸대와 히데오. 해수격멸대는 개마고원의 호랑이를 멸종시키고자 하고, 생물학자인 주홍은 개마고원의 호랑이를 만나기 위해 해수격멸대에 합류하여 산과 마주하게 된다. 개마고원에서 흰머리는 영리함을 보이며 직접적인 공격없이 해수격멸대를 몰살시킨다. '흰머리'를 본 그 순간 공포감에 휩싸여 룰도 없는 방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는데.....
결국 흰머리의 적은 산이고, 산이 총을 겨눌 녀석은 흰머리뿐이다.
밀림무정 密林無精
주인공 산이 항상 들고 다니는 총(모신나강)에 새겨진 네 글자. 거칠고 단순하고 치열한 본능만이 존재하는 밀림에는 사사로운 정 따윈 없다. 숨 가쁘게 펼쳐지는 뜨거운 본능의 이야기가 끝없이 계속 된다는 뜻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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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무정>에서의 무대변화는 무척이나 공평하다. 흰머리에게 유리한 개마고원, 게다가 허리만큼 쏳아지는 눈과 혹한의 추위에선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고, 흰머리에게는 놀이터가 된다. 그러나 흰머리와 최고의 포수 산과의 대결에서 산에게 흰머리는 칼을 맞게 된다. 자연은 흰머리에게 무조건 유리한 개마고원의 상황에서 장난을 치고 싶었을까? 엄청난 눈사태가 맞물려 흰머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로 박혀버리는 칼날이다. 그리고, 산은 흰머리에게 모신나강을 들이미는데......
주홍의 저지가 있기도 전에 산은 결심했을 터. ' 공평하지 않다. 치졸한 방법으로 너를 이길 수 없다.'라는 생각때문에, 그는 흰머리의 상처를 수술해주기로 마음먹고, 해수격멸대와 함께 흰머리를 경성으로 옮긴다. 이리하여 무대는 경성으로 옮겨진다. 흰머리와 어울리지 않는 경성은 흰머리를 약자로 만든다. 그리고 흰머리를 구하기 위한 주홍과 산, 쌍해의 작전. 경성일지라도 흰머리의 포효는 나에게 희열까지 선사한다.
산이 흰머리에게 복수 하기를 바라기도 했고, 주홍의 말처럼 조선의 마지막 야생 흰호랑이기에 호랑이를 보호하고도 싶었다. 갈팡질팡하는 독자, 나는 정말 이 책의 결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해와 달이 번갈아가며 창을 두들기든 말든 읽기 바빴다. 게다가 한페지를 메우는 한줄 한줄은 한자한자 읽지 않으면 아까워 미칠 것 같은 묘사력으로 좀처럼 책읽기의 속도를 내지 못하게 한다.
흰머리는 왜 하필 범바위에 서서 경성을 굽어보고 있을까. 저 근대 도시가 호랑이를 괴롭히고 더럽힌다고 여긴 탓일까.
(-제 2권 , page. 382)
7년간 아버지의 원수, 그리고 수를 외팔이로 만들어버린 흰머리를 쫓아 자신의 평생을 바친 산이 주홍을 만나고, 쌍해의 7년전 고백을 통해 목숨을 지켜줄 포수로 변하게 된 아이러니는 왠지모를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나는 어느새 산이 그렇듯 원수같은 호랑이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밀림무정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결국은 정을 줘야만 하는 밀림인 것인지......
1940년 일본의 통치하에 우리들의 산은 정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산에 대못을 박는 만행도 호랑이를 몰살시키는 해수격멸대와 상통하는 듯 하다. 백호, 개마고원의 수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산의 정령. 영험한 그 백호를 죽여야만 하는 한 남자의 운명적인 추격전을 보면서 그와 함께 숨쉬고, 가쁘게 개마고원을 내달리는 기분이 썩 괜찮다. 어찌보면 개마고원을 침입한 건 우리 인간이 아닌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입장이라면 흰머리가 더 할 터이다.
개마고원의 백호를 추격하는 포수와 백호를 지키려는 여인 주홍과의 사랑. 오로지 포수에게 있어서 삶이란 흰머리의 심장에 총을 정확히 박아 넣는 것이였는데, 그런 마음에 금이 간 틈을 비집고 들어온 주홍은 포수와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 나에게 개마고원의 꽃피는 봄을 갈망하게도 한다. 적다운 적과의 대결, 흰머리와 포수는 결국 함께 숨쉴 수 밖에 없는 사이일까, 적다운 적은 평생을 함께 하고픈 정인과도 같은 존재일까,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건물 스스로도 숨쉬기 힘든 도시보다, 겉치레를 모르는 밀림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이유는 <밀림무정>에서 본 자연의 경이로움의 자락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개마고원의 드넓은 눈밭에 정강이까지 적셔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