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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평점 :
지난해 일어난 일은 무엇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무엇인가.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가 온다 리쿠. 그녀의 이 필명은 우리 나라 사람들 깊숙히 각인되어 있으며, 미스터리 하면 애거사 크리스티. 그리고 온다 리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크리스티의 작품을 본 적은 종종 있으나, 이 이름도 유명한 온다 리쿠의 책은 본 적이 없으니 어디다 명함내밀기도 어려운 나였다. 그러다 이번에 만난 그녀의 작품 < 여름의 마지막 장미 > 를 만났다. 블랙 표지에 차가워보이는 그러나 지독히 향기로운 장미. 뭔가 섬뜻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를 갖고 있는 책이 아닐까 싶은 선입견을 떨치고 책을 읽었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온다 리쿠에게는 26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2003년 일본에서 여재되었던 소설이다. 그런 작품이 이번에 우리 나라에서 번역출판되었다. 이 글을 쓸때 ' 본격 미스터리 마스터스'에 수록될 것을 염두해 두고 썼다고 하니, 그녀의 미스터리 작품세계를 이 한권으로 가닥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된 특징은 [제1 변주]~[제 6변주]로 나뉘어진 파트마다 화자가 변화되는 점이다. 화자가 변화되면서 읽는 독자는 책속의 하나의 인물이 될 수 있다. 첫번째 등장한 화자를 통해 보여지는 진실을 두번째 화자에 의해 더욱 또렷해지는 방식. 윤곽이 드러날 때마다 퍼즐 조각은 맞춰지지만 그 퍼즐조각 자체의 존재감을 의심하게 되면서 독자의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얽힌다. 판의 조각들을 비틀어 보여주더니 다음 장에서 그것을 또 비틀어버리는 온다 리쿠식의 미스터리는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호텔에서 일어나는 사건. 이것은 밀실로 보여지는 배경을 바탕으로 그 속에 초대된 사람들과 초대자, 사와타리집안의 세 자매 (이치코, 니카코, 미즈코)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와 더해져 진실 혹은 허구에 대한 주사위를 던지게 한다. 세자매의 아버지가 지은 호텔. 호텔의 위치는 숲과 가까이한 으슥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매년 한번씩 모이는 이 모임은 어떤한 음산한 사건들을 몰고 온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전달된 잡안을 중상하는 편지, 어린애 장갑, 그리고 어린애 줄넘기는 어떠한 사건을 예고하는 것일까? 이야기의 시작부터 주목을 끄는 커다란 쾌종시계는 흡사 관을 연상시킨다.
"할아버지에게는 이곳이 꿈이 장소였는지 모르겠지만, 사와타리 집안 전체로 보면 불행한 기억으로 점철된 곳이거든." (Page. 94)
류스케와 혼인한 사쿠라코. 사쿠라코와 그녀의 남동생 도키미쓰의 사랑. 아름다운 남매 사쿠라코와 도키미쓰를 사랑하는 류스케. 류스케의 사촌 미즈호. 미즈호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 다쓰요시. 사쿠라코와 다쓰요시의 비밀스러운 연애. 서로 뒤죽박죽으로 얽어매어 놓은 온다 리쿠는 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호텔안의 이야기를 각 장이 발전될 때마다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준다. 그러나 각 장마다 죽음을 당한 이들은 다음 장에 등장한 화자의 눈속엔 버젓히 살아있다?
" 우리 모두가 기억을 날조하고, 자신에게 생겼던 일, 과거에 있었을 일을 날마다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Page 372)
여름의 마지막 장미속에서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인용문이 있다. 그것은 <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불멸의 연인>인데, 이 영화의 각본인 글을 인용해 놓고 글의 이음새를 메워간다. 데자뷰를 주제로 한 이 영화는 이 책의 전반의 중심을 뚫고 지나간다. 데쟈뷰. 무엇이 진실이였는지, 거짓이였는지......
사쿠라코의 동생 도키미쓰는 자신이 사랑한 사쿠라코에 대한 배신감에 그녀를 죽였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등장한 류스케의 눈엔 그녀가 살아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 일년이 지난 후 다시 모인 모임자리에서 고백한다. 도키미쓰는 그녀를 죽였다고... 분명 사쿠라코는 죽었었는데, 다음장에 살아있는 것이 의야해서 읽는 동안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과연 온다 리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역시 저자는 책과 함께 하는 독자에게 그 답의 한켠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것이 허구였는지, 진실이였는지는 내가 판단하면 될 일이였다. 데쟈뷰......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화려하고 꿈꾸왔던 그 누군가의 소망으로 이루어진 호텔이 결국엔 불행의 소굴이였다는 것, 작게는 있는 자들의 피의 향연과 인륜을 줄에 매달린 봉제인형 다루듯 하는 만행을 고발하고 드넓게는 그 누군가의 기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그 사람도 모르는......허구와 진실을 오고가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을 꼬집는 것 같았다.
중간에 등장하는 영화의 각본이 삽입되어 책의 흐름과 함께 해 나갔지만, 사실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강한 임팩트를 받아 이 책을 쓸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였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끝내......아니 결코 인용문이 들어있는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란 영화를 보거나 혹은 그 각본을 한번쯤 읽었더라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조금 은 쉬웠지 않았을까......
그러나 온다 리쿠만의 독특한 트릭이 담긴 미스터리를 접했다는 것에서 나는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