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김성민 글, 이태진.조동성 글 / IWELL(아이웰)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장군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이 사건으로 안중근 장군은 사형을 선고받아 31살의 생애를 마감한다.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한다.

 

어쩌다가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안중근 열사, 안중근 의사란 말은 이제부터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혼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독립군의 장군으로서 거사를 치른 것이다. 체포되어서 법정에서 독립군 장군으로서 저격을 한 것이라고 법적절차를 요구했으나 그 주장은 무시되었다. 일본인들이 '의사'라고 붙였다는 말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호칭은 '총 잘 쏘는 포수가 잘못된 애국심으로 저지른 단독 살인행위'란 주장을 할 수 있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 앞으로 안중근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의사란 말은 틀린 것임을 알려줄 것이다. 이 단편소설덕분에 귀중한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안중근 장군이 법정에서 한 말이 감동적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한국의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전체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중국, 한국,일본 세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거사였다고 말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항소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저술중인 동양평화론을 마무리하고자 했으나 약속을 지켜주지 않는 일본측. 그는 그렇게 사형을 받았다. 그가 쓴 <동양평화론>이 많은이에게 알려졌다면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안타까운 탄식이 나왔다.

 

호부견자(호랑이 아비에게 개 같은 자식)라는 손가락질을 받은 안중생이 왜 친일을 선택했을까. 그의 어린시절부터 보여지는 이 책안의 내용을 읽다보니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안중근장군처럼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것때문에 변절자로서 살아야 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역사속 숨겨진 이야기를 만난 듯 씁슬한 기분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미니북을 만났다. 총 페이지 117.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제목이 아는 말이긴 하지만 무척이나 강렬하다.

순간 불끈 쥐어지는 손. " 이토 히루부미......"하고 나지막하게 내 입에서 뱉어져나온다. 응?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눈쌀부터 찌푸려지는 이 반일감정. 일본인들은 역사적인 과오를 용서받고 싶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역사속을 들여다보면 주먹이 쥐어지고 눈이 찌푸려지는건 어쩔 수 없는 애국심(?)이랄까?   

아. 그냥 애국심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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