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법에 기입된 것이 아니면 그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은, 법의 언어로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들리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정심밖에 없다. "안됐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에 호소했을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절벽에 부딪히면 사람은 더욱 더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고통 그 자체도 무의미한데 고통을 해결하려는 자신의 호소조차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람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극단의 고통을 겪게 된다. - P101

민중신학자 정용택은 이를 "고통에서 고난으로의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당한 고통의 실존적 무의미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난‘이 될 때 사람은 비로소 무의미를 딛고 ‘겨우‘ 일어나는 근거를 만들 수 있다. - P102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P106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 - P114

고통은 거의 대부분 비교 불가능하다. 비교를 통해 자기가 좀더 나은 상태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 P115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 P125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 - P126

왜 남성의 노동은 높게 평가받고 여성의 노동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가. 왜정신노동은 육체노동보다 값어치가 더 비싼가. 사실 한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이 인정 체제를 바꾸는 것과 같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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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화분의 세계는 신비로웠다. 인간의 세계와는 달랐다. 인간의 세계가 ‘말‘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식물과의 관계는 ‘손‘으로 이뤄졌다. 말로 이뤄진 인간의 세계가 불안하고 언제든 배신으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라면 식물과 만든 세계는 정직했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였다. 말이 없더라도 교감하고 소통하고 구축할 수 있는 관계였다. 말에 의해 배신당하고, 배신의 고통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에게 식물은 ‘손‘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해주었다. 그 관계는 배신이 없는 깨끗한 세계였다. - P69

여기에는 다시 배신당하고 싶지 않다는 절망이 있었다. 그 배신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음, 그러나 말하고 싶음. 말을 하지 않으면 아예 이해를 받을 수 없지만, 말을 하면 이해가 아니라 오해만 쌓이고 거리가 멀어졌다. 아예 이해를 기대하지 않는것이 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될수록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살아 있기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식물‘뿐이었다. - P71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측면뿐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모색해야 할 일은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것이다. 실존적 측면을 ‘사회적‘으로 나누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그 고통의 사회성을 환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 혹은 도구로서 의미가 있다. - P76

선아가 ‘분리‘라는 말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너무 확실하게 설명해버리는 이 단어는 종종 선아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했다. 모든 것이 다 ‘마음‘과 ‘분리‘의 문제로 귀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두 단어는 확실히 그로 하여금 문제를 지나치게
‘심리학화‘하여 바라보게 만들었다. 문제의 사회적 측면이나 실존적 측면을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선아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 P87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언어가 무너질 때마다 선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흐느끼고, 한숨 쉬고, 절규하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시 ‘말‘의 세계에서 ‘소리‘의 세계로 돌아갔다. - P88

몇몇 모임은 당사자들이 겪은 사안을 지나치게 빨리 사회학적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렇게만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그 결과 고통의 ‘개별성‘은 앙상한 것으로 날아간다. 고통을 개인화하는 잘못을 경계하면서 제거되지 않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보다는 사회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개별성이 ‘사연‘이나 ‘사례‘로 여겨진다. 나눔의 자리에서는 개별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경청‘되는 것같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자리에서는 선언적인 사회학적 언어만 남는다. - P90

"인간의 언어로는 지금 내 심정이나 상황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어.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지.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거야." - P95

고통에 직면하여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파괴되는 집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말을 잃어버리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 붕괴되어버리는, 다시 지을 수 없는 공동의 집은 세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들과 짓는 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의 끔찍함은 이 모든 거주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해버린다는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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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을 때든 무너져 있을 때는 항상 가까이에서 나를 돌보고 염려해주었던 이들이 있다는 데 감사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삶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거, 그게 기쁨이에요." 이처럼 고통은 "왜 하필 내가?"라는 억울함을 거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자기에 대한 앎‘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 P39

자기에 대한 앎이란 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삶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 P40

무엇이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는 그것이 어떤 좋은 열매, 즉 교훈을 남길 때다. 또한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이 있고, 그 끝이 더 좋은 열매를 남길 때 우리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고통 역시 가치가 있다면 교훈을 남기며 끝이 나야 한다. 교훈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성장을 꾀할 수 있을 때 고통도 가치가 있다. - P44

정도가 압도적인 고통, 결말이 죽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고통, 전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고통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런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삶에도 이르게 하지 못한다. 설혹 자기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 고통을 다루고 해결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 P48

고통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타자이다. 그러나 그 타자와 주체의 자리는 바뀌어 있다. 고통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귀신 들린 몸이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는 내 몸이 아닌 이 몸을 부수어버리고 싶고 절규하고 싶어진다.


고통은 소리치는 것 말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은 고통을 묘사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고통의 가치와 의미다. 억지로 외부로부터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만일 무의미한 것이라면 고통을 통해 우리는 어떤 내면과 세계도 지을 수 없다. 말을 통해 소통되는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내면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54

결국 그가 알게 된 것은 이 고통을 말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에게뿐만이 아니다. 종종 자기 스스로도 이게 정말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병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자기 몸이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몸은 아니 ‘뇌‘는 이미 별것 아닌 게 아니라고 판정해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적으로 부정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그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속상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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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으로부터 장수를 빼앗으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릴지는 모르나 한 사나이로부터 그의 지조를 빼앗지는 못한다." - P398

기본적인 틀에 가까울수록 삶은 감미로운 법이다. 당신은 낭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고차원의 법칙을 따르는 삶을 살면 저차원의 세속적인 것들에는 초연하게 된다. 지나친 부를 소유하면 불필요한 것들만 사들이게 된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 P398

우리 눈을 멀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동트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앞으로도 수많은 날들이 밝아오리라. 태양은 한낱 샛별에 불과하다. - P404

결국 권력이 시민에게 있을 때 다수 의견이 채택되고 이렇게 채택된 의견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현실적인 이유는, 다수의 의견이 옳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거나 다수 의견을 따르면 소수에게가장 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가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 P409

우리는 통치를 받는 한 나라의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어야 한다. 인간은 법을 존중하기보다는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권리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의무를 말한다. - P409

군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들이 관여하게 된 일이 저주스러운 일임을 안다. 그들은 모두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존재인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부도덕한 권력자에 봉사하는 움직이는 요새이자 탄약고인가? 해군 기지에 가서 해병을 한번 보라. 정부가 마술을 부려 만들어낸 듯한 그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그림자이자 흔적에 불과하며, 육신은 살아 있어도 이미 몸의 절반 이상이 땅속에 묻힌 채 장송곡을 듣고 있는 인간이나 다름없다. - P410

"나는 태생이 고귀하므로 소유당하지 않고
통제받지도 않으며,
이 세상의 어떤 주권 국가의
하인이나 도구로도 이용되지 않는다." - P411

나는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정치적 조직을 한순간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 P411

흔히들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아직 상황을 개선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선이 더딘 진정한 이유는 다수보다 실제로 더 현명하거나 낫다고 할 만한 소수마저 없기 때문이다. 다수가 나 자신만큼 선해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선한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이 전체 집단을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 - P413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반드시 승리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다수의 결정에 맡긴다. 따라서 다수로 결정된 의무는 편의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정의를 위해 던진 한 표는 정의를 수호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않는다.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투표자의 의사를 그저 미온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문제를 운에 맡기려 하지 않으며, 다수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집단 행동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 P414

부당한 법은 존재한다. 부당한 법을 준수해야 하는가, 개정될 때까지 준수하는 한편 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아니면 즉시 위반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와 같은 정부 아래에서 법 개정을 위해 다수를 설득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항을 하면 현재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항으로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 책임은 정부에 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장본인은 바로 다름 아닌 정부다. 정부는 왜 개혁의 필요성을 예견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정부는 왜 현명한 소수의 견해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는가? 정부는 왜 다치기도 전에 울고불고 엄살을 부리며 저항하는가? 정부는 왜 시민들이 정부의 잘못을 감시하고 지적하도록 권장하고 시민보다 솔선수범하지 않는가? 정부는 왜 늘 예수를 처형하고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축출하고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란군으로 매도하는가? - P418

법이 본질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다면 그 법은 즉시 위반하라. - P419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태어난 이상 좋든 싫든 이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무엇이든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할 필요는 없으므로 피치 못하게 잘못을 저지를 이유도 없다. - P419

한 표를 행사할 때 단순히 종이쪽지를 던지지 말고 자신의 모든영향력을 온전히 한 표에 담아 던져라. 다수에 순응하는 한 소수는 무력하며 그런 소수는 진정한 의미의 소수가 아니다. 소수가온 힘을 다해 저항하면 다수는 당해내지 못한다. - P422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 - P424

내게는 정부에 대한 불복종으로 받는 처벌보다 정부에 대한 복종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더 크다. 정부에 복종하게 되면 나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느껴지리라.
. - P425

왜 교직자인 나는 그 성직자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하고, 그 성직자는 교직자인 나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425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가리라. 누가 가장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수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 내가 준수하는 법보다 상위법을 준수하는 사람들만이 나를 강제할 수 있다(상위법은 민법이 아니라 정신적인 법, 즉 인간의 양심을 말한다).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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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이 치욕스럽지 않은가? 인간은 대체로 다른 동물을 희생시키면서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그러나 올가미로 토끼를 잡거나 양을 도살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깨닫게 되듯이, 이는 비천한 삶이다. 인간에게 보다 순수하고 건강한 식습관을 고수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류의 구원자로 여겨지리라. 실제로 내 식습관이 어떻든지간에, 나는 점진적으로 진보해서 결국 육식을 끊게 되는 것이 인류의 운명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야만인들이 문명 세계와 접촉한 후 식인 풍습을 없앴듯이 말이다. - P272

나무는 내 몸을 두 번 녹여주었다. 한 번은 장작을 팰 때 몸에 열이 나면서 후끈해졌고, 또 한 번은 난로에서 장작이 제 몸을 불살라 내 몸을 녹여 주었다. 그러니 이보다 더 많은 열을 뿜어내는 땔감이 있겠는가. - P311

하기는 내가 오랜 시간 격렬한 폭풍에 노출되었을 때 몸 전체가 마비되기 시작했는데, 집에 도착해 안락한 실내에서 몸을 녹이고서 곧 회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한 우리는 호화롭게 지은 집에 산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인류가 마침내 어떤 식으로 파멸을 맞을 것인지에 대해 추측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북쪽에서 조금만 돌풍이 불어도 인간의 명줄은 쉽게 끊어져 버리리라. 우리는 얼어붙은 금요일도 대폭설도 견뎌냈지만 그보다 조금 더 춥거나 조금 더 눈이 오면 지구상에서 인류의 존재는 종지부를 찍게 되리라. - P314

"평온함을 보지 못하는 이는 눈이 멀었다!" - P330

나는 그처럼 분별력 있고 편협하지 않으며 초지일관인 사람은 보지 못했다. 어제가 오늘과 같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을 뒤로 하고 지난날의 자취를 따라 거닐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세상에 물들지 않았고 자유롭고 꾸밈없으며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또한 아름다운 경치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천지가 맞닿은 듯했다. 그의 평온함은 푸른 하늘과 같다. 그에게 어울리는 집은 자신처럼 평온한 드높고 푸른 하늘이요, 그에게 어울리는 옷은 하늘처럼 푸른색이리라. 그도 여느 사람처럼 죽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자연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이다. - P331

"오 군주여, 우리는 이 우주의 놀랍고 다채로운 광경을 탄복의눈길로 바라보고 영혼에 투과시킵니다. 밤이 오면 이 거룩한 창조물에 베일이 드리우지만 날이 밝으면 이 위대한 작품은 대지에서 창공까지 펼쳐지며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 P346

나는 마치 언덕에 둘러싸인 초원에서 있는 것처럼 눈 덮인 호수 위에 서서 1피트 깊이의 눈을 파 들어간 후 다시 1피트 두께의 얼음을 깨서 발밑에 구멍을 만든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호숫물을 들이키며 물속에서 조용히 노니는 물고기를 들여다본다. 표면을 갈아 뿌옇게 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처럼 부드러운 빛이 호수에 스며들고 밝은 빛의 모랫바닥은 여름과 다를 바 없다. 땅거미가 내리는 호박색 하늘처럼 변함없이 잔잔한 평온이 스며 있는 호수는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고요함과 조화를 이룬다. 천국은 우리 머리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발밑에도 존재한다. - P347

우리의 상상력은 자연보다 더 깊숙이 잠수하고 더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니 아마 대양도 그 넓이에 비해 그다지 깊지 않으리라. - P353

우리 눈에는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일맥상통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법칙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더 경이롭다. 여행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산의 모습이 끊임없이 변하는 듯 보이지만, 변하는 것은 그가 산을 바라보는 위치일 뿐 산의 형태는 그대로이듯이 특정한 자연의 법칙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특정한 관점을 형성한다. 산에 움푹 뚫린 구멍이나 갈라진 틈새만 보고 산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 P356

마침내 태양 광선이 직각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하고 따뜻한 바람이 안개와 비를 몰고 와 쌓인 눈을 녹였고, 태양의 열기는 여기저기 얼음이 녹아 황갈색으로 얼룩덜룩해진 풍경에 안개를 뿌리고 흰 연기가 향불처럼 피어오르게 했다. 길손은 이 연기를 헤치고 졸졸 흐르는 수천 개의 실개천과 겨울의 묵은 피를 혈관에서 씻어 내보내는 개울의 흥겨운 소리를 들으며 섬에서 섬으로 길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나아갔다. - P370

머지않아 둑뿐만 아니라 모든 언덕과 평원과 웅덩이에서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굴에서 나오는 네발 달린 짐승처럼 서리가 땅속에서 흘러나와 바다와 더불어 음악을 연주하고 구름을 타고 먼 곳으로 떠나가리라. - P375

겨울에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연약한 섬세함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겨울을 보통 거칠고 사나운 폭군으로 묘사하지만 겨울은 마치 연인처럼 여름의 삼단 같은 머리털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치장해 준다. - P376

"지구가 돌아온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땅속의 열기를 뿜어내듯이 언덕 기슭의 풀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일어난다." - P377

"이렇게 미덕의 어린 싹이 성장하는 데 여러 번 방해를 받게 되면 너그러운 저녁의 기운도 그 싹들을 지켜내기에 충분치 못하게 된다. 이렇게 저녁의 기운이 새싹을 지켜내는 데 역부족이게되면 인간의 본성은 야수의 본성과 다르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야수의 본성을 지닌 사람을 보면 선천적으로 이성을 타고 나지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야성과 이성은 진정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성향인가?" - P382

자연을 만끽하는 데 있어 도가 지나침이란 없다. 우리는 자연의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광활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고, 또 난파선의 잔해가 널려 있는 해안을 보고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살아 있는 나무와 죽어서 썩어가는 나무의 거친 야생을 느끼고, 비구름이 울리는 천둥소리를 듣고, 삼 주 동안 계속 퍼부어 홍수를 일으키는 비를 겪고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 P384

"너의 시선을 내면으로 향하라.
그러면 너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천 개의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지역들을 여행하고 자신의 세계에 통달한
전문가가 되어라." - P388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소를 위해 대를 희생하여 애국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만드는 땅은 사랑하면서도 자신들의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는 정신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애국심은 그들의 뇌를 갉아먹는 구더기이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떠들썩하게 출정식을 가진 남부 해양 탐사원정대"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도덕적인 세계에는 수많은 대륙과 해양이 존재하고, 인간 개개인은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작은 해협이나 섬에 불과하며 우리는 아직 그 작은 해협과 섬조차 탐험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행위이다. 또 자신만의 바다, 자신만의 태평양과 대서양을 탐험하기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정부가 지원한 배를 타고 추위와 폭풍과 식인종의 위협을 무릅쓰며 수천 마일을 항해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 P389

인간의 의무는 사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통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존재의 법칙에 순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태도가 무엇이든 그 태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그러한 자기 존재의 법칙은 정의로운 정부(만약 그런 정부를 갖게 된다면)의 통치 철학과 반대되는 입장에 절대로 서게 되지 않을 것이다. - P391

자신이 품은 꿈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고 자기가 꿈꾼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달성하게 된다. 꿈을 추구하자면 포기해야 할 것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도 극복해야 하리라. 꿈을 추구하면 새롭고 보편적이고 보다 진보적인 법칙이 자신의 주위와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혹은 기존의 법칙이 더 진보적인 의미에서 자신에게 적합하게 확장되고 해석된다. 그리하여 그는 한층 더 숭고한 존재의 법칙을 따를 권리를 지니고 살게 된다. 그러한 법칙에 맞추어 그가 자신의 삶을 담백하게 만들면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도 그리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고 고독은 고독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빈곤과 약점도 더 이상 빈곤과 약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공중에 성채를 짓는다고 해도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 그곳이 바로 성채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성채들 아래로 기초를 단단히 올리면 된다. - P392

나는 제약 없이 나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다. 나의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마찬가지로 정신이 깨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고 싶다. 진실한 표현은 그 기초를 다지는 데만도 제약 없는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 P393

봄을 서둘러 여름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재능을 발휘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대체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포자기하고 보잘것없는 현실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갖은 고생 끝에 우리 주위에 푸른 유리로 하늘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완성하고 나면 유리로 된 하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너머에 있는 드높은 창공을 염원하게 되리라. 그래도 유리로 하늘을 만드는 헛수고를 하겠는가? - P395

우리가 물질에 부여하는 겉모습은 종국에는 진실만큼 우리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 진실만이 오래 지속된다. 대부분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있다. 우리는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 자신을 놓이게 하는 결함을 갖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상황에 놓이게
되고 거기서 헤어나오기는 두 배로 힘들어진다. 온전한 정신일때 우리는 사실만을 본다. 의무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라. 그 어떠한 진실이라도 거짓보다는 낫다. - P396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겹고 척박하다고 해도 회피하지 말고 삶을 직면하고 살아내자. 삶을 회피하거나 욕설을 퍼붓지 말자.
삶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가장 부자일 때 삶은 가장 가난해 보인다. 트집을 잡으려 드는 사람은 천국에 대해서도 흠을 잡는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우리의 삶을 사랑하자. 가난한 집에서조차 즐겁고 흥겹고 거룩한 시간들은 있다. 저무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빈민 구제소의 창문이나 똑같이 밝게 비춘다. 가난한 집의 문 앞에 쌓인 눈도 이른 봄에는 녹기 마련이다. 온화한 정신을 소유한 자만이 가난해도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하고 즐거운 생각을 하게 된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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