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물의 의식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그건 분명 인간의 의식보다 어둑할 것이고, 꿈같이 덧없을 것이고, 반쯤 녹은 양초처럼 작은 생각들은 절대 윤곽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명쾌하게 생각하느라 기를 써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 P71
바깥 한기를 막아주는 묵직한 커튼 사이로 아침의 첫 빛줄기가 내리비치던 순간에 나는 형에게 물었다. 그때는 답을 듣지 못했지만, 손에 한가득 나사를 들고 앉아 있던 나를 두고 위층으로 내달려 침대 위에 옹송그린 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미 혼날 채비를 하던 형은, 그에 대한 답을 내리고자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앞으로 무엇이 닥칠지. 미래에 형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직조기를 바라보던 형은 어쩐지 어렴풋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고통스러워했다는 확신이 든다. 그 환영은 형을 표독스럽게 붙들었고, 이전까지는 오직 게임과 폭탄을 향해서만 느끼던 섬뜩한 이끌림에 불을 지폈다. 그런 것을 정확히 감지할 수 없었던 나조차도 발치에 흩어진 기계의 잔해를 보고 있자니 속이 살짝 메스꺼워졌다. 그 감각은 이후로도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 P79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자기 상상에 심취한 그들이 부러웠다. 그때 나는 다 알면서도 일부러 주변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륙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십대로 예쁨받는 즐거움에 젖어 전쟁의 숙명 따위를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참 한심한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안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곡창지대였기에 전시 기근으로 밀 가격이 치솟으면서 부자는 더욱더 부유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굴었다. 끔찍해 보이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인류에 관한 단순한 진실을 아주 일찍이 깨쳤다. 문 앞에서 악마가 문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우리 인간은 춤출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그랬다. 그런데 그게 진짜 우리 탓이려나? - P82
사방에서 폭발적으로 산업화가 일어났으나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봄철의 제비꽃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우린 부족한 게 하나 없었다. 날마다 새로운 게 나오는 듯했다. 새로운 발견, 새로운 농업 생산량 기록, 새로운 상품, 새로운 옷. 새로움의 짜릿함이 항상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다. 즐기는 것. 우리는 놀았다. 이 전쟁에서 저 전쟁으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흥청망청 술에 취해 춤을 췄다.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멋진 세상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의 놀이란 다급한 것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잴 것 없이 무조건 즐거워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뭐가 닥칠지 알고 있었으니까. 왜인지는 몰라도, 우린 그냥 알았다. 남자건 여자건. 돈이 많건 적건.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애들처럼 굴며 어린애들이 가장 잘하는 짓을 했다. 아무 문제도 없는 척 그냥 계속 노는 것. 세상은 알아서 굴러갈 테니까. - P83
칸토어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연구하라고 등 떠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은밀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무한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개입 때문이었노라고 확신하게 됐다. 진정한 계시가 모두 그렇듯, 칸토어는 자신이 받은 계시가 위대하고 초월적인 확실성으 로 인류를 이끌리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누구도 그의 무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적들은 기를 쓰고서 그의 앞길을 망치고 연구를 좌절시키려 들었다. 칸토어는 당연히 프로이센에서 내로라하는 대학 어디서든 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지만, 후미진 할레에만 머무르며 점점 줄어드는 친구와 동료 무리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연구가 몇몇 사람에게 불러일으킨 두려움은 결국 우리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 지고하고 완벽한 형태의 무한임에도, 진정한 무한을 바라볼 가능성을 파괴하는 일종의 근시안이다. 얼마 전 미타 그레플레르에게서 편지를 받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내가 발표하려던 글이 ‘약 백 년은 시대를 앞섰다‘라고 평했다. 그러면 1984년까지 기다리라는 소리인데, 그건 누구에게나 과한 요구가 아니던가! 누가 뭐라건 간에 나의 이론은 바위처럼 굳건하다. 그것을 겨냥한 화살은 족족 되돌아가 암살을 시도한 자의 심장에 꽂히리라." - P101
의심은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할지 모른다. 처음부터 없던 믿음보다 사라진 믿음이 더 나쁜 까닭은, 성령이 저주받은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며 생긴 구멍처럼 떡하니 공백을 남기기 때문이다. - P112
거대한 탱크가 덜컹거리며 대로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맹세컨대 야노시는 주인이 남은 음식을 제 밥그릇에 붓는 소리를 들은 개처럼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쳤다. 다 큰 어른이 탱크를 보겠답시고 어린애처럼 사람들 머리 위로 방방 뛰어대고, 아마도 훗날 우렛소리와 함께 유럽을 짓밟을, 산 자와 죽은 자의 뼈를 으스러뜨리고, 대륙에 들이닥쳐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으로 우리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굶기고 고문하고 몰살한 나치의 무력 기습을 이끌게 될 바로 그 죽음의 차를 얼빠지게 쳐다보며 손을 꺾어대는 모습은 정말로 섬뜩했다. 괴이한 기계에 정신이 팔린 그를 보면서, 그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그에게 희망은 거의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은 거의 없었고, 나에게는 분명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14
나는 이미 나름의 이민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지만, 그는 나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했다. 알았다고는 했으나 그가 어째서 이민을 미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왜 계속 유럽에 머무르려 하는지, 독일에는 왜 자꾸 가는지 물었다. 그는 수학의 기초에 가까이, 거의 다 근접했노라고 했다. 머릿속에서 그것이 간질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 역사, 특히 고대 제국 쇠망사 에 별나게 집착했던 연치는 나치를 무한히 혐오하면서도 정확히 언제 독일을 뜨면 될지 알 수 있으리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정확히 미래를 내다보았는가를 지금 와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의 예지력은 정보를 처리하고 역사의 물결에서 현재의 알갱이들을 걸러내는 뛰어난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진심으로 안심했으며,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내 꺾였을 과신에 차 있었다. 야노시는 실로 한참을 앞서 있어 마치 모든 것을 과거의 일처럼 돌아보는 듯했다. - P116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연치는 괴델의 말을 즉각 이해했으나 처음에는 쉽사리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괴델이 옳다면 연치를 비롯해 어느 누가 무슨 짓을 하건 간에, 수학을 공리화하는 일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논리적 기초를 발견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내부 역설과 모순에서 자유로운 공리의 형식 체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체계의 규칙으로 결코 증명할 수 없는,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참인 진실과 명제가 내포되므로, 체계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괴델이 연치에게 보인 것이었다. 괴델의 발견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하지 못한, 존재론적 한계라 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 증명 불가한 진실은 수학자의 악몽이었고, 연치에게는 사적인 재앙이었다. 어떤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으로도 메꿀 수 없는 거대한 틈새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괴델의 논리에 깃든 철학적 함의란 실로 엄청났으며, 훗날 불완전성정리라고 알려진 그의 이론은 오늘날 인간 이해의 한계를 시사하는 근원적인 발견으로 여겨진다. - P119
괴델의 정신쇠약에 관해서는 워낙 기록이 많지만, 그가 않았던 유형의 편집증이 그가 몰락한 원인인 동시에 수학적 위업의 뿌리였다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빈 대학교에서 아주 젊은 시절의 괴델을 보았던 어느 교수는, 그가 불안정한 이유가 연구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애당초 불안정한 상태여야 괴델처럼 사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두 관점 다 옳다고 본다. 몇 차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의 논리와 논리적 사고가 점점 심해지는 정신착란과 떼어놓을 수 없이 엮여 있음을 감지했다. 어떻게 보면 편집증은 논리가 미쳐 날뛰는 상태라 할 수 있으니까. "혼돈은 모두 잘못된 외피를 두르고 있다." 괴델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지극히 흔하고 일상적인 일들 뒤에서 그것을 은밀히 조종하는 음모와 힘을 보게 된다. 하지만 괴델을 망친 건 마음의 불균형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들여왔으며 우리가 여태껏 극복하지 못한 생각 때문에도 타격을 입었다. 증명 불가한 진실과 불가피한 모순. 이 자기 지시적인 논리의 악몽이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그를 집어삼겼다. 그 악마는 지상에 내려오고 나면 무슨 수로도 다시 쫓아낼 수 없는 존재였고, 나의 벗 야노시마저 갉아먹은 존재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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