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건 멋있는 게 아니라 그저 술을 마시는 건데. - P153

그렇다. 여자들이 조금의, 아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법적으로 허용된 공간이라면 그 어디에서든지 밖혼술을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당연히 좋은 세상이다. 밖혼술의 기준에서 세상은 그리 좋아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나빠졌다. - P155

어쩌면 내 마음에는 절이 아니라 주막이 지어져 있을지도. - P156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평소에 따옴표 안에 차마 넣지 못한 말들을 넣을 수 있는 따옴표. 누군가에게는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뾰족한 연필심은 뚝 부러져 나가거나 깨어지지만, 뭉툭한 연필심은 끄떡없듯이, 같이 뭉툭해졌을 때에서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말들.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영원히 속에서 맴돌며 나도 상대도 까맣게 태워버릴지 모를 말들. 꺼내놓고 보면 별것 아닌데 혼자 가슴에 품어서 괜한 몸집을 불리는 말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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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들어서 외울 정도인 그런 유의 비슷비슷한 점괘들 중에 그래도 하나 마음에 남은 건 ‘이 사람 마음 한구석에는 절이 지어져 있다‘는 말이었다. 같은 말이어도 그림이 그려지는 표현이어서였을까.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서 쉬고 싶거나 속이 시끄러울 때면 내 마음속에 지어져있다는 절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 P141

하지만 소주를 따서 자작하기 시작하니 주변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오며 가며 쳐다보는 시선이 확연히 늘었고, 눈이 마주쳤는데 피할 생각도 없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먹던 상에 그냥 술 한 병 더 추가됐을 뿐인데 갑자기 추가된 것들이 많아졌다. 권여선 소설가는 산문집 『오늘 뭐 먹지?』에서 순댓국집에서 순댓국에 소주를 시켜 혼자 마시는 여자에게 "쏟아지는 다종다기한 시선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이라고 썼는데, 정말 그랬다. 그동안 오직 바에서만 혼자 술을 마셔봤던 나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시선들이었다. 권여선 소설가처럼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라고 호쾌하게 받아넘기기까지 소주 반병이 소요됐다. - P147

"한 장만 먹으면 막걸리 남잖아요. 한 병엔 두 장이지."
난 그만 아주머니에게 반할 뻔했다. 김치전을 한 장 더 주신 것도 주신 거지만, 이렇게 한 쌍으로 묶이는 두 가지 음식의 소진 속도와 적절한 양적 균형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사람은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새 한 김 식은 김치전은 적당히 따뜻했고 당연히 맛있었고 아주머니 말대로 막걸리 한 병과 똑떨어졌다. - P150

이니셜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다. 사실 여자들의 혼술에는 예전부터 감수해야 할 몫들이늘 있어왔다. 냉채족발집에서 겪은 것 같은 묘한 시선들은 많게든 적게든 종종 따라붙었다. 주문을 받는 가게 주인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대면할 때도 있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여자가 초저녁부터 밖에서 혼자 술도 마실 수 있고" 같은, 세상이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이유 그 자체인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시비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때로는 그 뒤에 시비의 강도가 거세져도 말릴 생각 않고 거기에 슬쩍 묻어 힐난의 눈빛을 던지는 가게 주인이나 주변 손님들의 이야기가 덧붙기도 했다. 그런 경우 대개는 여자가 결국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밥집에서 혼자 반주를 마시는 여자를 괘씸해하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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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도 말했다. 마음을 두루 살펴려면 걸어야 한다고. 걷는 것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고. 소요학파들은 늘 느리게 걸으면서 토론했고, 소설의 영감을 야간 산책에서 얻곤 하던 찰스 디킨스는 친구에게 "걷는 동안 머릿속으로 쓰면서 웃음을 터뜨리다가, 흐느끼다가, 또 흐느꼈다네" 라고 말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은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멋진 무기가 있음을 깨" 달았다고 했고, 헵타포드는 지구인들에게 "offer weapon" 이라고 했다. - P98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 P104

무례하거나 부적절하게 욕을 쓰는 사람은 나도 싫지만, 표현으로서의 욕까지 묶어서, 특히 여자가 욕하는 걸 두고 ‘천박하다‘ ‘저급하다‘고 말하는 일부 ‘고상한‘ 사람들을 향한 반감. 일단 사람을 놓고 등급을 따지는 식의 태도는 뭐가 됐든 별로다. 작은 부분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별로 다. ‘맞춤법이 사람의 품격을 좌우한다‘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 같은 말들도 그래서 싫어한다. 맞춤법 중요하지. 근데 그걸로 사람의 품격을 매긴다고? 맞춤법 잘 지키는 사람이 틀리는 사람에 비해 격이 높아? 정말? 그 잘난 구두 하나로 누구의 인생을 판단한단 말이야? 남의 구두를 보고 남의 인생을 판단하는 사람의 협소한 인생 정도는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내 눈에는 욕하는 여자에게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도 곱지 않았다. - P107

살면서 그런 축소와 확장의 갈림길에 몇 번이고 놓이다 보니, 축소가 꼭 확장의 반대말만은 아닌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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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이는 형은에게, 나이 많은 사람들을 무조건 불신하는 버릇, 갑작스럽게 분노를 폭발시키며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에둘러 타일렀다. - P144

채이는 형은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민감한 마음을 보았고 어렵지만 그 마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 형은은 채이를 보며 사람들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일을 조금씩 연습했다. 몇 달을 서로 외면하며 한차례 폭풍을 겪고 나니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 채이는 그게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왔다. 경혜는 채이가 형은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채이의 손을 놓아준 것이었다. - P144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채이는, 너도 내 얼굴 보자마자 화가 났어? 하고 물으려다 그만두곤 했다. 그날, 지하철역에서 오랜만에 형은의 얼굴을 보았을 때 채이 역시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화가 났으니까. 형은의 다름이 채이를 화나게 하고 미움을 솟구치게 했다. 체온이, 함께한 시간이, 열이 내렸는지 보려고 서로의 이마를 짚어보던 밤의 기억이 있어서 그들은 가까스로 영원히 헤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렵고 어색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고, 이름을 말하고,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나눠 갖기 시작할 수 있을까, 채이는 생각했다. - P147

아무런 보상도, 보상을 받고 싶다는 마음도 없이 아직 가보지 못한 어떤 시간과 장소들을 그려보았고 사람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젊었고,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다. - P148

여성주의라는 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서, 자신도 그 안에 있다고, 우리는 적이 아니고 같은 편이라고,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여성은 여성에게 너무 쉽게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해요. 서로를 그렇게 적대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건 세연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기획에 동의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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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은 진경을 동경하면서 남몰래 미워했다. 너는 정말이지 살만 빼면, 좀 꾸미고 다니기만 하면 인기가 많을 텐데. 남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진경이 떠올랐다. 남자들에게 세연은 편하게 야구와 축구와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 똑똑하고 재미있어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그 관계들은 동등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세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경 같은 여자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연 같은 여자 역시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들이 세연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했다면 자신들의 섹스 경험을, 여자들에게 했던 악행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같은 여자로 세연이 느낀 모멸감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 P137

어른들은 어디서 울까.
경혜를 볼 때마다 채이는 생각하곤 했다. 쌤, 쌤은 언제 울어요? 어디 가서, 누구의 어깨에 기대서 울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쌤은 나랑 밥을 먹으면 항상 계산도 혼자 하고,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다 들어주기만 하잖아. 쌤의 투정은 누가 받아줘요? 쌤 친구 많아? 많겠지. 하지만 그중에 나 같은 친구 있어요? 없으면 내 앞에서 좀 울어도 되는데. - P142

어른이면 그래야 하는 건가. 저렇게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아픈 티도 안 내야 하고, 고양이처럼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숨어 울어야 하는 건가. 나는 어른 돼도 그러기 싫은데.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투정 부리고 싶을 땐 투정도 부리고 싶은데. - P143

쌤의 그 곧은 어깨를, 늘 곧던 어깨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던 힘을, 무게를, 채이는 자주 생각했다. - P143

모두들 채이에게 말했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버티기만 해달라고. 하지만 채이는 형은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고 싶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 가시가 가득한 껍질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어도 형은은 아직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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