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은 진경을 동경하면서 남몰래 미워했다. 너는 정말이지 살만 빼면, 좀 꾸미고 다니기만 하면 인기가 많을 텐데. 남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진경이 떠올랐다. 남자들에게 세연은 편하게 야구와 축구와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 똑똑하고 재미있어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그 관계들은 동등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세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경 같은 여자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연 같은 여자 역시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들이 세연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했다면 자신들의 섹스 경험을, 여자들에게 했던 악행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같은 여자로 세연이 느낀 모멸감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 P137
어른들은 어디서 울까. 경혜를 볼 때마다 채이는 생각하곤 했다. 쌤, 쌤은 언제 울어요? 어디 가서, 누구의 어깨에 기대서 울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쌤은 나랑 밥을 먹으면 항상 계산도 혼자 하고,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다 들어주기만 하잖아. 쌤의 투정은 누가 받아줘요? 쌤 친구 많아? 많겠지. 하지만 그중에 나 같은 친구 있어요? 없으면 내 앞에서 좀 울어도 되는데. - P142
어른이면 그래야 하는 건가. 저렇게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아픈 티도 안 내야 하고, 고양이처럼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숨어 울어야 하는 건가. 나는 어른 돼도 그러기 싫은데.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투정 부리고 싶을 땐 투정도 부리고 싶은데. - P143
쌤의 그 곧은 어깨를, 늘 곧던 어깨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던 힘을, 무게를, 채이는 자주 생각했다. - P143
모두들 채이에게 말했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버티기만 해달라고. 하지만 채이는 형은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고 싶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 가시가 가득한 껍질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어도 형은은 아직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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