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삼십여 분에 걸쳐 느릿느릿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물결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반짝이며 명준이 서 있는 쪽으로 밀려왔다. 거기에 오작동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정밀한 움직임이 명준을 안심 시켰다. 완벽하다. 여기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명준 자신을 포함해서. - P140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순간, 명준의 기억 속에서 혜진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짙은 눈썹, 약간 너른 미간에 외까눈, 부드럽게 휘어지던 턱선. 그냥 읽으면 돼. 마치 처음 대본을 읽던 신입생 때처럼 그는 기억 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것은 여름의 얼굴이었고, 그가 그녀에게서 사랑의 기미를 느꼈던 얼굴이었고, 여름이 끝나자 사라져버린 얼굴이었다. 백신 접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잠들지 못하던 그녀가 거울 속에서 찾던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었을까? 숙소로 함께 돌아가는 동안, 그는 자주 고개를 돌려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들에 조금은 놀라서, 또 조금은 알 것 같아서. - P146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 - P147

어둠에는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멀리서 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빛도, 대지의 윤곽을 만들며 밤하늘로 은은하게 번지는 빛도 있었으리라. - P149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고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 P150

봄의 울음과 달리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상실감은 있었다. 연극이 끝났다는 것, 더이상의 술자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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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마자 나는 로버트를 깨워서 옷을 입히고 부축해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인도까지 그를 부축하고 나서야 다시 올라가 포트폴리오를 가져올 수 있었다. 가진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문득 올려다보자 투숙객 몇몇이 수심에 찬 얼굴로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는 인사했다. "안녕, 안녕." 마치 자신들의 발을 묶고 있는 지옥에서 탈출하는 어린애들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버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지금 견디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왔다. "다 괜찮아질 거야. 다시 일을 할 거고, 그러면 모두 해결될 거야." 그에게 말했다.
"나아지겠지, 패티." - P121

집안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암울했다. 남동생 토드가 곧 해병대에 입대할 예정이었다. 어머니는 열렬한 애국자이긴 했지만 동생이 베트남에 파병될지도 모른다며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미라이 대학살에 깊이 상심했고, 그 사건을 두고 시인 로버트 번스의 말을 인용해 ‘인간이 저지른 반인류적 행위‘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뒤뜰 화단에 수양버들(weeping willow우는 버드나무)을 심는 걸 지켜봤다. 이 나라가 선택한 길에 대해 아버지가 느끼는 슬픔을 상징하는 듯했다.
많은 이들이 1960년대 이상주의의 장렬한 끝으로 보통 12월 알타몬트에서 열린 롤링스톤스 공연에서 관객들이 피살당한 사건을 든다. 하지만 나는 1969년 여름에 일어난 우드스톡 페스티벌과 맨슨교 숭배라는 이중적인 면을 지닌 두 사건의 혼재야말로 종말의 시작점이었다고 생각한다. - P145

첼시 호텔은 100개의 방이 모여 있지만, 그 각각이 하나의 소우주인 환상지대 속의 인형의 집 같은 묘한 공간이었다. 난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그들의 생각과 영혼을 만나보려 애썼다. 내 모험심은 약간 무모해 열린 문틈 사이로 버질 톰슨의 그랜드피아노를 훔쳐보기도 하고 아서 C. 클라크 명판 근처를 배회하며 혹시나 그가 갑자기 나타나진 않을까 기대하곤 했다. 가끔 독일 출신의 미술사학자 게르트 쉬프 교수가 피카소 작품을 들고 지나치는 걸 보기도 했다. 모두가 나름대로 비범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지만, 부자는 없었다.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들도 흥청망청 술을 마실 여유가 다였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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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한 시간을 그렇게 가망 없이 만들어버리는 사람이 있더라고, 하지만 내가 그 관계에서 퇴장하고 나면 상대의 이상한 정리방식에는 개입할 수 없다고. 그들이 험담과 왜곡과 수동공격으로 자기 삶을 시시하게 만드는 동안 우리는 다른 걸 고민해보자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고립 없이 솔직해질 수 있을까 같은. - P163

내 사랑은 내 사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만 부활하고 있다. - P164

사람을 잃기 싫어서가 아니라 변화가 귀찮고 싫어서 군말 없이 끌려간 게 화근이었다. 변화가 싫지만 지겨운 건 더 싫어서 그들을 떠났다. S가 맞았다. 나는 후회했다. 진작 내 지도를 돌려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들이 내 지도를 가져가서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용인한 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고. - P172

어디 담지도 키우지도 못 할 말들이 헤매는 날. 머릿속에 오두막 한 채 짓는다. 그 안에 말들을 차곡차곡 들여보낸다. 후회할 거야. 너는 잘못 살고 있어. 넌 결국 외로워질 거야. 오두막에 불을 붙인다. 말이 탄다. 재가 남는다. 후, 분다. 재가 후회의 냄새를 덮는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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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떠 있는 검은 하늘. 그리고 그 모든 별들 중에서 가장 큰 별, 달. - P89

"너는 그곳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찾게 될 게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서. 나를 야위게 만들었던 꿈들이 있는 곳, 나무와 숲이 빽빽하게 늘어선 곳, 추억거리가 마치 성당의 현금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곳······. 그곳에서 너는 느낄 것이다. 사람들이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얘야, 그곳은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그 어느 때든, 그 어느 것이든 언제나 똑같지만, 딱 하나, 사물의 색깔을 바꿔놓는 공기는 다르단다. 그곳에는 마치 속삭이는 듯한 공기가 떠돌고 있어. 생명의 속삭임 같은······." - P93

- 아주머니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요?
- 여느 영혼들처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자들을 찾아 떠돌고 있겠지. 어쩌면 나는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미움을 샀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제 그런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뭔지도 모르는 양심의 가책을 찾다가 지칠 대로 지쳤거든. 나는 끼니도 거른 채 괴로워했지. 내게 쏟아지던 욕설과 저주를 송두리째 감수했던 기억 때문에 밤새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어. 그러면 됐지, 이제 뭘 더······. 죽는 날을 기다리며 주저 앉아 있는데, 내 영혼이 간청하더구먼. 일어나라고, 질질 끌려 다닐망정 억척스럽게 살라고. 순간 나의 죄업을 씻어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지. 하지만 이미 삶을 포기했던 나는 "모든 것은 여기서 끝난 거야. 나는 더 이상 이런 삶을 끌고 갈 힘이 없어."라고 말한 뒤에 입을 열어주었지. 나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 나는 느꼈어.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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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부활한 구세주를 몰라본 도마를 질타하겠지만, 기독교에서 그는 뜻밖의 대접을 받고 있다. 도마가 없었더라면 예수의 부활은 증명받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도마의 의심은 예수의 신성을 확인하는 도구였다. 그렇다면 나의 의심은 사람들이 흔히 진심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용의자들, 피해자들, 중인들, 구경꾼들, 또 역사의 영웅들과 악당들, 배신자들, 매국노들과 애국자들, 부자들과 가난뱅이들, 친구들과 가족들 등등······ 나는 가능한 거의 모든 인간들의 진심을 나의 저울에 올려본다. 이 저울의 반대편에는 사실의 세계가 놓여 있다. - P75

제가 공책에 받아 적은 끔찍한 글을 읽고 난 뒤에도 저를 이해해준 사람은 아빠뿐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지 이해하진 못하셨잖아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 P85

질문이 있습니다.
뭔가요?
아까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 P88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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