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바다에 광풍이 불기도 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 P198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사랑은 바다만큼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아름답지 않아도 내 속에 들어앉은 이 허허한 느낌은 분명 사랑이었다. 지금 내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굴곡 심한 도로를 운전하고 있는 이 남자는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사랑이었다.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안진진, 괜찮아?‘라고 묻고 있을 이 남자를 통해 나는 앞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었다. 때로 추하고 때로는 서글프며 또한 가끔씩은 아름답기도 할 사랑을······. - P199

"낯설어 죽겠단 말야. 왜 그렇지? 장우씨는 알아? 갑자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무서워.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구요. 사랑하면 이렇게 세상이 낯선거냐고······." - P202

소주에 관한 말은 끊겼지만, 낯설음에 대한 절절한 고백은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진실, 바로 그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문득 달리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당황해 하는 출발선상의 달리기 선수처럼 나는 그날 오후 한없이 막막했던 것이다. 오른발부터 내밀고 달려야 하는지 왼발 먼저 힘을 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 어디를 움직여야 이 무거운 몸이 앞으로 나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마라토너의 절망이 고스란히 내 것이었음을 김장우는 정녕 모를 것이었다. - P203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P206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 등이 바로 사랑이다. - P210

내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김장우보다 나영규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다.
나영규라는 남자, 이토록 못나게 생긴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다니, 고맙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고마움도 사랑이라면. - P216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 P217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 P218

그래도, 사랑의 유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김장우와 함께 떠났던 서해바다에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 장렬한 비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누추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였다. 부끄러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온 사랑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지 않다. 저 바다가 푸른 눈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 P219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 P219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 P227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P229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 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 P232

첫눈 내리는 거리에 남겨진 나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이모는 진짜 나와 신나게 놀고 싶어했는데 혼자 여러 가지를 유추하고 분석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여겨지던지. 그래도 여전히 장난이 아니라고 우기는 내 속마음은 또 얼마나 강렬했던지. - P235

그의 기대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김장우에게 스스럼 없이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므로 결혼한다면, 결혼으로 서로의 사랑이 물처럼 싱거워진다면. - P236

나는 포기했다. 숨겨놓은 치부를 고백하고 있는 마당에도 자신도 모르게 육성 대신 가성을 사용하고 있는 진모. 무엇이 육성이고 무엇이 가성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분별을 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 이제는 그렇게 사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 P248

나는 오래도록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이게 아닌데 하는 의혹. 그 의혹은 조금 오래 지속되었다.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라는 그 말, 그것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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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적 감정은 우리가 까다롭게 굴려고 마음먹을 때 – 다시 말해 솔직하려고 마음먹을 때–배어나는 감정이라고 비난받는다. 소수적 감정이 마침내 표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우울, 공격의 감정으로 해석되며, 백인들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인종화된 행태가 그런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은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다. - P86

1992년 LA 폭동의 불길이 사우스센트럴에서 북상해 한인 타운으로 번졌을 때 우리 가족이 살던 웨스트사이드에서는 한 줄기의 연기도 안 보였으며 희미한 경찰 헬리콥터 소리조차 안 들렸다. 나중에 한인 타운에서 불에 탄 잔해를 본 기억은 있지만, 대체로 내가 기억하는 폭동은 한국 남자들이 가게 지붕에 올라가 총을 들고 망을 보는 모습이나 가게에 들어온 15세의 라타샤 할린스를 사살한 두순자가 법정에서 형 선고를 기다리는 모습 같은 뉴스 영상들이다. 라타샤 할린스가 살해된 사건은 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관들이 무죄로 풀려나기 몇 달 전에 일어났지만, 흑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어 폭동 발생에 기여했다.
나는 두순자가 사회봉사명령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난 것이 부끄럽다. 가게 직원들이 흑인이 물건을 훔칠 것으로 생각해서 그들 뒤를 따라다니고, 개업한 동네에서 주민들과 더 열심히 교류하려고 애쓰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 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반감이 부끄럽다. 바로 그래서 아시아인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다. - P89

인종에 관한 글쓰기는 이제까지 우리를 지워버린 백인 자본주의 인프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격렬한 비판을 담지만, 우리의 내면이 모순들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이기도 하다. 나는 손쉬운 극복의 서사에는 저항하지만 우리가 인종 불평등을 극복할 거라는 신념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민자가 고생하는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짜증스럽지만 한국인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심하게 트라우마를 겪은 민족에 속한다. 내 안에 깃든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고정 관념을 넘어서려고 시도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how) 인식되는지가 내가 누구인지(who)에 내재한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인종에 관해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거의 서사를 거슬러 글을 써야 한다. 인종화된 마음은 프란츠 파농이 말한 대로 "지옥 같은 악순환"(infernal circle)이기 때문이다. - P95

퀴어 이론가 캐서린 본드 스톡턴은 퀴어 아동이 어떻게 "옆으로(sideways) 자라는지" 적으면서, 퀴어의 삶이 흔히 결혼과 출산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톡턴은 유색 인종 아동 역시 옆으로 자라는데 그들의 어린 시절도 퀴어 아동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백인 아동이라는 모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어린 시절을 옆으로 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면, 어린 소녀가 내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 나의 기억들을 깜박거리는 환상의 그림자놀이로 유도한다.

옆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을 함축한다. "곁눈질"은 의심, 의혹, 심지어 경멸을 암시한다. - P101

아동기와 순수함을 동일시하는 것은 영미권의 창조물이며 19세기까지 그런 생각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그전에 아동을 작은 성인처럼 취급했고, 칼뱅교도로 키워질 경우 아동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여겼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현재 우리가 감상적으로 다루는 어린 시절을 구축한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다. 시 「영생불멸을 암시하는 노래」에서 워즈워스는 아이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가 신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아이를 어른보다 현명하고 경이로운 존재로 본다. "나는 너희의 환희에 하늘도 함께 미소 짓는 것을 본다". 워즈워스는 향수에 관한 주요 구축자 중 한 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소년을 자신의 실패에 실망한 성인이 몽상을 쏟아낼, 자신을 대리할 그릇쯤으로 보며 시를 쓴다. - P102

『문라이즈 킹덤』은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비교적 무해하다. 그러나 "노골적인 백인 인종주의가 ··· 온통 언론을 도배"하는 현 상황에 충격받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향수에 젖은 "차폐 기억"을 지어내도록 이 나라를 자극하는지 자문하게 된다. 수많은 현대 영화, 문학, 음악, 생활양식에서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란 누가 남과 다르면 온 국가가 맹렬히 적대시했던 시대에 대한 환상을 의미하고,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도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에 기억을 심어주는 할리우드 산업은 백인 향수를 일으키는 가장 수구적인 문화적 주범이며, 무한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갇혀 1965년 이후로 미국의 인종 구성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출연진을 보면, 유럽 혈통만 조심스럽게 골라 그들만 미국인으로 등장하도록 보장하는 백인 우월주의 법이 아직도 이 나라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다. - P106

미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에 기억을 심어주는 할리우드 산업은 백인 향수를 일으키는 가장 수구적인 문화적 주범이며, 무한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갇혀 1965년 이후로 미국의 인종 구성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출연진을 보면, 유럽 혈통만 조심스럽게 골라 그들만 미국인으로 등장하도록 보장하는 백인 우월주의 법이 아직도 이 나라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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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로 진모가 개과천선해서 새 삶을 살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기대는 일찌감치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애시당초 진모에게는 새 삶이라는 것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 애에게는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다만 역할이 바뀔 뿐이었다.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진모가 해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 애의 마음속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그 애만의 우상이 존재하는 한은. - P188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 P188

우리가 얻은 방은 다행히도 온돌방이었다. 김장우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침대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줄 그 많은 이미지들을 어찌 감당할는지 나는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을 이끌어버렸을 때 그 자괴감을 어찌 견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세속의 도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침대는 정신보다 육체를 더 많이 요구하는 침구라는 것이었다. 특히 숙박업소의 침대는 더욱 그랬다. - P192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 P193

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 P194

나는 시종일관 밖을 보았고 그는 운전하는 틈틈이 나만 보았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바깥만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나는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이 난 후부터 나는 나를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김장우는 언제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그런 뒤에도 아무렇지 않았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처럼 이렇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 혹시 있었냐고 의논하고도 싶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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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솔직함으로 나영규를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 안진진이라면 이런 도박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교활하니까. 나는 마치 마지막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다 건 노름꾼처럼 굴고 있는 것이었다. 전부를 잃느냐, 아니면 전부를 얻느냐의 게임, 그러나 다 잃더라도 다음날이면 어딘가에서 다시 도박판을 벌이고 있을 노회한 노름꾼. - P157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 P164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리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더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주리를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탐험해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인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내 이종사촌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와 그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그 많은 시간들이 우리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 P178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참말이지,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화선 저쪽에서 몰랐을 것이다. 이모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왈칵 울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벌써 가득 고여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창밖을 보았다. 거기 가을을 건너가고 있는 높고 푸른 하늘이 무심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 P180

나는 타인들 앞에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장악할 수 없어 스스로를 방치해버리는 순간을 맛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 했지만, 나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 P184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독서는 아닐 것이었다. 그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미래에 내 어머니가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또 어떤 난해한 분야의 책들을 골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는 결코 이모가 읽어왔던 그 많은 소설책이나 시집을 선택해 책값을 치르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했다.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이 책에 의지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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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순도순했던 외갓집 풍경도 아버지의 패악이 굳어지면서 점점 뜸하게 연출되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의 불행이 너무 깊어버리면 어떤 행복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머니도 점차 외갓집 발길을 끊었다. - P133

이모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유하자면 이모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삼십 년이 가깝도록 단 한 번의 결행이나 연착 없이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 같은 사람이었다. 기차라면, 쇠바퀴를 굴려 굽이굽이 강가도 달리고, 덜컹컹 산자락도 달리는 기차라면, 폭설 후에는 결행도 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피하느라 연착도 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세상의 다른 부류들한테는 이해받기 힘들겠지만 하여간 이모부가 생각하는 기차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모부의 기차는 굽이굽이 강가를 달리더라도 절대 한눈을 팔면 안 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들이받고라도 다음 역에 늦게 도착 하면 안 되는 기차였다. - P141

이모와는 특별했지만 나는 이종사촌들과는 그리 각별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 철이 들어 서로 교류를 나눌 수 있을 만한 나이에 이르러서는 그들 둘 다 유학을 떠나버렸다. 유학을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이종사촌들과 공유할 만한 추억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처럼 이종사촌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도저히 대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와 달랐던 점은 이종사촌들에 대한 질투심을 감쪽같이 잘 숨기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질질 흘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완벽한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 P142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미소 짓는 주혁의 얼굴에서 이모부의 얼굴을 읽어냈다. 지난 4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내가 보았던 이모부의 의례적인 미소가 거기 있었다. 아니, 불발이나 연착 따윈 죽어도 용납하지 않는, 그래서 인생을 심심하게 만드는 이모부의 얼굴이 아들인 주혁에게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주리와 주혁이는 이모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역시 엄연한 이모부의 자식들이었다. 나와 진모가 어머니의 자식이면서 아버지의 삶으로 많은 부분 규정지어진 것처럼. - P145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P152

그 애를 그렇게 방치할 수 없었다. 푸르른 일몰의 시간, 사방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는 그 시간, 그 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고 그랬으므로 푸르른 일몰의 시간은 숙명적인 우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 P153

지난 몇 년 동안의 평화를 어떻게 견디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머니는 이 불행을 해결하는 데 온갖 신명을 다 내고 있었다.
벽을 붙잡고 절규를 하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과장법은 이렇게 쓸모가 있었던 것이었다. 부풀릴 수 있을 만큼 한껏 부풀려놓은 불행에서 이처럼 맵시 있게 빠져 나오는 어머니. 8월에 보는 어머니는 역시 과장법의 대가였다. 나는 진실로 어머니에 대해 감탄했다. - P156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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